송원松原이 만난 산청인(37) 한평생 농촌발전에 힘쓴 공재식 진주노인대학 사무국장

산청시대 2024-05-16 (목) 13:42 1개월전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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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식孔再植(79) 진주노인대학 사무국장은 생비량 사람이다. 그는 송계초등학교와 진주중학교, 진주농림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지도직 공무원으로 울산시 농촌지도소에 첫 발령을 받아 근무하다가 진주시 농촌지도소와 산청군 농촌지도소 단성지회에서 지소장을 역임했다.

평생을 공무원으로 대민봉사에 일관하였으며 자신의 부귀와 영달보다는 항상 어려운 농민들의 편에 서서 친절과 봉사정신으로 일관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이러한 공로로 경남도지사상과 농촌진흥 청장상을 수상하였으며 국가로부터 모범공무원 상을 받았다. 모범 공무원으로 선정되자 그 포상금으로 매월 10만원씩 3년간 상금이 나와, 작은 성의지만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을 격려하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유용하게 쓸 수 있었고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선행공무원으로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퇴직할 때는 옥조근정훈장을 수훈하여 국가의 인정을 받았으며 퇴직 후 이동섭 법무사 사무소에서 사무직 실장으로 근무한 바 있다. 뒤에 진주노인대학에 사무국장으로 16년간을 근무하며 노인의 복지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공자 후손인데 가문을 소개하신다면.

“어릴 때부터 아버지(先考)께서 늘 말씀하기기를 ‘공자 선조님의 후손이니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선고께서는 이름 난 학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공자가문의 후손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항상 근신하고 말과 행동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고, 우리 자녀들께도 항상 엄격한 교육을 하셨다. 이러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란 우리 가문의 형제들은 추호도 남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항상 조심하고, 나 자신보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정신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나이 80이 임박해 회고해 보면 마음뿐이었지 실천이 되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선고의 뜻을 이어받아 저 역시 자녀들에게 항상 아버님의 유지를 전하고 있다.”

 

-농촌지도소 근무때 기억에 남는 일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6.25 전쟁을 겪은 뒤 우리 농촌의 생활상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어떻게 하던지 국민의 배고픔만은 해결해야 되겠다.’라는 신념으로 식량증산 소득증대를 외치며 통일벼 재배를 권장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농가에서는 식량증산은 되지만 미질(米質)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정부시책에 반하여 통일벼 재배를 기피하는 현상이 많았다. 이 시기에 농촌지도소에 근무하면서 각 마을을 순회하며 통일벼 확대재배를 권장하는 마을 방송을 수없이 하며 홍보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는 농가가 많아 심지어는 공무원들이 통일벼가 아닌 못자리 논은 강제로 짓밟아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 모두가 이웃 어른들인데 애써 가꾼 모판을 짓밟을 때는 차마 가슴 아픈 악역이었지만, 국민들도 서서히 이해하게 되었고, 그 덕분으로 국민들의 배고픔도 차츰 해결되었고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니 보람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선구적인 일도 하였다는데.

“당시 농촌의 농민들은 벼와 보리이외의 작물은 생각지도 못할 때였다. 더구나 필자의 고향인 생비량면은 산청군 중에서도 좀 낙후지역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벼 보리보다 좀 소득이 낳은 품종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느타리 버섯을 재배하게 되었다. 이 사업이 적중하여 차츰 산청군 전역으로 확대재배하게 되었고 당시로 봐서는 큰 소득원이 되었다. 또 군청 4H 담당계장을 하면서 농촌청소년들에게 지덕노체를 강조하며 한 차원 높은 정신무장과 농촌의 획기적인 발전방향을 연구하고 확대 보급하는 선구적인 지도를 하면서 벼농사에 의존하던 농촌이 젊은 4H회원들을 중심으로 차츰 소득이 높은 작물로 전환하고 잘사는 농촌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가소득을 증대하는 경제작물이 느타리버섯 외에 또 무엇이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고, 고민 끝에 딸기나 애호박 채소 과수 등을 확대 재배하여 고소득 시대를 열었다. 또 꽃을 재배하여 마을마다 꽃길을 조성하여 쾌적한 농촌 환경을 조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진주노인대학 사무국장을 16년째 맡고 있다.

“정년퇴직하고 난후,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진주노인대학에 행정을 담당하게 된 것이, 학장 네 분을 모시며 어언 16년이 흘렀다. 아마도 평생직장이고 최후의 직장이 될 것 같다.  진주노인대학은 진주시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공립노인대학으로서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는 1,000여명의 학생이 이용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학교이다. 70대에서 80대가 대부분이며 지금은 700여명이 재학하며, 대부분의 노인대학은 1주일에 하루 2시간 운영하는 것에 비해, 2일 8시간을 운영하는 활력이 넘치는 대학이다. 교양강좌 체조교실 노래교실 장기자랑 등으로 다양한 교육을 하며 매월 버스를 대절하여 현장체험학습을 실시하며 노인들이 즐겁고 보람찬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노인 학생이 700명이면 어려움은 없는지.

“학생들의 학력은 무학에서 대졸까지 다양하고 생활수준이나 인성 또한 천차만별이지만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들이고 경륜이 높은 분들이라 통제에 잘 따라주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특히 학생회 간부들이나 각 반에 반장 총무가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이끌어주어 일사분란하게 운영되고 있다. 다만 연세가 있으시니 기억력이 부실하기에 묻고 또 묻고, 명찰도 잊어버리면 만들고 또 만들고를 반복하지만 봉사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어른들이 더러는 질투도 많고 삐지기도 하고 숫자가 많으니 바람 잘날 없지만 그러는 가운데 세월도 가고 학사운영도 흘러가는 것이다.”

 

-한때 법무사 사무소에도 근무하셨다.

“공무원을 퇴직하고 이동섭 법무사 사무소에 실장으로 몇 년 근무케 되었다. 그때도 찾아오는 민원인들이 대부분 억울한 분이나 법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아, 서민 약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최선을 다해 법무사님께 보고 드리고 좋은 결과에 이르도록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그때 느낀 사건들 대부분이 예상외로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있는 악덕 인들이, 무지하고 선량한 국민들을 이용하고 등을 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서민을 보호하고 악덕인 들에게는 과감히 철퇴를 가해야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평소 좋아하는 유교경전 구절은.

“선조(先祖) 공자님께서 제자 안자(顔淵)가 인(仁)에 대해서 묻자,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라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명예욕 재물욕 색욕 등 사악한 욕심이 생길 수 있지만, 법을 떠나 스스로를 경계하고 예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사는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라고 했으니 이대로 인(仁)을 실천하고 산다면 건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니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또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라,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만고의 명언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항상 배우고 익히며 또 배운 바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지금도 스마트폰 교육에 열심히 수강하고 있으며 모르는 것은 묻고 배우는 자세를 지니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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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사당 제향

 

-산청군민에게 바라는 말이 있다면.

“산청은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선비의 고장이다. 그리고 산청의 동의보감촌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방 약초의 메카로서 무한한 가능성이 입증되고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산청출신 향우들은 어디에 살더라도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애향심을 가지고 살아가기 바란다. 그리고 보다 높은 소득 작물을 연구하고 재배하여 군민이 잘사는 고장, 행복한 군민, 자랑스러운 산청이 되었으면 한다.”

 

산청에서 태어나 고향 산청의 어려운 농촌부흥을 위해 젊음을 바쳤던 공재식 사무국장.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허리띠 졸라매고 보리 고개를 넘으며 고달픈 삶을 살았던 우리의 부모들이 허기를 면하고 차츰 활기를 되찾게 되었고 잘사는 농촌으로 발돋움 하는 계기를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노년에는 노인대학에서 마지막 그의 열정을 다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명예를 구함도 아니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니다. 다만 어려운 시대를 헤쳐 온 우리의 세대, 우리 선배의 세대들이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며 보다 즐겁고 보다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할 뿐이다. 그는 마지막 촛불이 다 탈 때까지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 기꺼이 이 길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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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심동섭  진주향교 원임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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