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 이면우의 시 ‘버스 잠깐 신호등에 걸리다’

산청시대 2021-04-27 (화) 21:05 2년전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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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조 / 전 농협중앙회 감사실장 

 

‘큼직한 손바닥에 상추 펼치고 깻잎 겹쳐 그 위에 잘 익은 살코기 얹고 마늘 된장 쌈 싸 한입 가득 우물대는 사내 보는 일 그것 참 흐뭇하오.
맑은 술 한잔 약봉지 털듯 톡 털어 넣고 마주 앉은 이에게 잔 건네며 껄껄대는 사내 보는 일 역시 흐뭇하오. 그 곁에 젊은 여자, 호 불어 넣어준 제 아이 오물대는 입을 그윽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소.
유리벽 이쪽에서 나도 저리 해보리라 마음먹은 저녁은 신호등 떨어진 네거리처럼 무수히 흘러갔소.’

<아무도 울지 않은 밤은 없다> 시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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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우의 시집 <아무도 울지 않은 밤은 없다>에 수록된 시다. 시집 제목이 우는 사람들을 어루만져준다. 지금, 이 밤에도 사랑에 울고 돈에 울고 이별에 울고 정에 우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낮보다는 밤이 더욱 사람의 감정을 녹이는 것은 달님의 시샘일까.
시집을 펼치니 우선 술술 쉽게 읽힌다. 어려운 말이 없고 비틀지 않는다. 먼저 풍경을 노래하고 화자의 삶을 가져온다. 가난하고 소박한 삶이 옛 생각을 나게 한다. 어쩌면 어려운 삶을 이처럼 고요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이면우 시인의 특징이다.

이 시 읽으니 많이 본 장면소주 한 잔, 옛 친구 생각

이 시를 읽으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다. 소주 한 잔에 옛 친구 생각이 난다.
시인은 대전에 있는 모 공공기관의 보일러공이다. 지금은 그래도 어엿한 직장이라도 있지만, 예전엔 공사판을 전전한 막노동 인생이었다. 그런 사람이 시인이 되었다.
말(馬)이 살찌는 계절 어느 날 해거름에 시인은 근무지인 지하 보일러실을 나서서 시내버스를 타고 퇴근하고 있었다. 길목 네거리 신호등에 걸려 타고 있던 버스가 잠시 정차 중이다. 그때 눈을 돌리니 길 건너편 식당 안에 외식하는 정다운 한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섬세하고 서민적인 표현

마침 사내는 볼이 터져라 입안 가득 우물거리고 있다. 그러기 전에 냉장고에서 막 집어 올린 맑은 소주 한잔 입에 털어 넣었음은 불문가지다. 여인은 옆에 앉은 제 아이 입에 알맞게 싼 고기 한 점을 밀어 넣어준다. 그러고는 맛있어 죽겠다는 듯이 입을 오물거리는 아이의 입을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시인으로서는 얼마나 흐뭇하고 부러운 풍경인가. -큼직한 손바닥에 상추 펼치고 깻잎 겹쳐 그 위에 잘 익은 살코기 얹고 마늘 된장 쌈 싸 한입 가득- 참 섬세하고 서민적인 표현이다. 고상한척하는 것만이 시가 아니다.

가슴에 묻어둔 약속 떠올라

시인의 점심은 늘 가난하다. 밥값 아끼려고 싼 식당만 찾아다닌다. 그런 처지의 시인이 퇴근길에 식당을 만났으니 오죽 시장기가 돌았을까. 그런데 시인은 배고픔보다 먼저 생각난 게 있었다. 항상 실행은 못 했지만, 가슴에 묻어둔 그 마음의 약속이 떠오른 것이다.
-나도 넉넉한 저녁나절에 아내와 아들. 딸 데리고 살코기 한번 배 터지게 먹여 보자- 그 마음은 멈춰선 버스 앞으로 흘러가는 저 많은 차 만큼이나 쌓였을 것이다. 마지막 연 -신호등 떨어진 네거리처럼 무수히 흘러갔소-가 잘 말해주고 있다.

꿈은 꿈으로 간직해야
시인의 꿈은 소박하다. 가족끼리 외식 한 번 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살림이라 해도 하려면 그까짓 거 왜 못하겠나. 하지만 시인은 이루는 순간 허망한 것이 또한 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꿈은 꿈으로 간직하자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참은 것이다.
시인 이면우의 지갑에는 신용카드는커녕 그 흔한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 없다. 대신 그의 지갑에는 아내가 정성 들여 접어준 하얀 종이 한 장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참을 인’(忍) 자 석 자가 보석처럼 박혀있다고 한다.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도 있다만, 이면우의 참을 ‘인’자는 그런 뜻이 아니다. 돈을 참고, 여자를 참고, 술을 참으라는 아내의 명령서다. 오죽 가난했으면 아내가 그랬을까. 아내의 간악함(?)에 혀가 휘둘려진다.

더 높은 시인 되었으면

이 시가 산만한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소박하고 솔직하고 비틀지 않은 시가 이처럼 사람을 정화시킴은 시인의 능력이리라. 높은 시인임에도 흔들리지 않고 박봉의 말직을 오늘도 이어가고 있는 시인의 삶이 이런 좋은 시를 만들고 있음일 것이다.
이면우의 시와 삶, 모두를 사랑한다. 시인은 이제 일흔을 넘겼다. 나와 한 동갑이다. 아직도 많은 세월이 남아 있다. 계속 정진하여 더 높은 시인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그런 소망으로 그의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를 항상 끼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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