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곡 마을

산청시대 2021-06-15 (화) 22:52 2년전 2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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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뒷산에 앉아 내려다본 방실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평화롭고 그지없다.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옛 기억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가슴 저리게 후벼댔다. 나를 아프게 했고 험난한 길을 걷게 만든 내가 태어난 곳…. 

 

자의든 타의든 방실마을은 나를 바로 서게 만들었고 풀어 나가야 할 많은 숙제를 안겨준 고향이다. 역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 맺힌 통한의 메아리가 들리는 듯 지금도 생생하게 나를 휘감아왔다.

 

사람이 죽고 나는 것은 하늘의 뜻이고, 생과 사도 일생을 값지게 일궈 나가며 이루어야 할 뜻을 주신 것도 하늘이라 했다. 우주 만물이 그렇듯이 한 알이 밀알이 썩어 수많은 새싹을 틔우듯 자연과 더불어 생의 섭리였을 것이다.
기어가는 것은 내 운명이라면 기꺼이 기어갈 것이고, 날아가는 것이 내 운명이라면 재빠르게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피할 수 있는 한,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한 톨의 작은 싹이 되기 위해 늠름하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일곱 살 어린아이가 있었다.
‘정재원’
운명은 어린아이의 인생을 처절하게 찢어 놓아 회한으로 얼룩진 인생행로를 걷게 했으니 어쩌면 어린아이의 운명도 하늘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 저편이고 싶지만 너무나 또렷한 1951년 정월 초이튿날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개월쯤이던 그날은 예나 지금이나 큰 명절인 설날의 다음 날이었다. 양력으로 그해 2월 7일이었다. 명절을 맞은 방실마을은 이 고샅 저 고샅에서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봄날을 재촉하고 있었다.
뭔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와서인지 걱정 반…. 억지웃음으로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박수근의 ‘빨래터’ 그림만큼 가슴이 뭉클했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강인한 삶의 의지가 곳곳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통에 군인으로 끌려가신 아버지 염려에 매일 밤 흐느끼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종종 훔쳐본 터에 어머니의 웃음은 곧 눈물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처마 끝 그림자로 시간을 유추하던 시절이라 아마도 오전 아홉 시나 열 시 되었을 시각이었다.
앞산 중매재 쪽에서 한 무더기 군인들이 음산하게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을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렸지만 전쟁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섬뜩했다.

나의 느닷없는 비명소리에 중매재를 한참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나 마을 골목길을 잰걸음으로 뛰쳐나가셨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어머니의 민첩한 행동은 침착하고 재빠르셨다. 그때 어머니의 차분하고 단아했던 기억들은 항상 뇌리에 생생하여 지금도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어머니가 신중하게 인도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중매재를 넘어오고 있는 불안한 그림자를 급히 알리고, 뭔지 모를 심각한 사태가 곧 일어날 것 같은 직감을 느꼈던지 그나마 남아 있는 남정네들에게 뒷산으로, 혹은 계곡으로 서둘리 피하기를 재촉했다.
남자라면 열 두세 살만 되어도 부역으로 시키거나 잡다한 노무를 위해 징집당했기 때문에 마을에 젊은이라곤 거의 없었다. 젊은 처녀나 새댁들은 세상이 흉흉해서 은밀히 숨거나 바깥출입은 거의 할 수가 없었다.

“주민 여러분! 우리는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 소속 군인들입니다. 저희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으니 마을 앞 논으로 한 분도 빠짐없이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온 고샅을 에워싸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군인들은 동네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며 꼬드겼다.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떨고 있던 순박한 사람들은 기쁜 소식이라는 말에 방문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기 시작했다. 순진무구한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논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살의를 느끼면서도 은근한 으름장을 견딜 재간도 없었거니와 이미 서슬이 시퍼런 그들의 총구가 곧 불을 뿜을 것 같은 기세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논에는 차디찬 정월 바람이 쌩쌩 칼날처럼 불어 대고 있었다. 손발이 시려 오그라들 것 같고 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께서는 지금부터 우리의 지시를 잘 따라야 한다. 말을 듣지 않거나 무슨 엉뚱한 짓을 하면 이 자리에서 바로 험한 꼴을 볼 것이다. 너희 식구 중 남자들은 다 숨어 버렸다. 남자들은 어디에 숨었나?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여기 모인 모두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바른대로 말하시오!”
몇 번이고 강조하며 윽박질렀으나 서로 눈치만 보며 한숨과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화가 치밀었는지 그들은 난폭하게 소리를 꽥 질렀다.
“좋게 말해도 듣지 않으니 모두 뒤로 돌아앉아!” “모두 눈을 감아!”
영문도 모르면서 착하디착한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뒤로 돌아앉아 눈을 꼭 감았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거리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총성이 지축을 흔들었다. 고요했던 산간벽지의 평화로움은 한순간에 깨져 버렸다.
‘탕! 탕! 타당 탕! 탕! 타당 탕!’
귀청이 찢어질 듯한 총소리와 함께 아비규환으로 온천지가 뒤흔들렸다. 돌아앉아 있던 사람들이 외마디소리와 함께 꼬꾸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논바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하늘을 뒤덮어 버렸다.

미처 총에 맞지 않은 사람들은 놀라서 내달렸지만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과 몇 걸음 도망을 치다가 총탄에 맞은 사람들은 시체 위에 겹겹이 쓰러졌다.
그것도 빨갱이가 아닌 국군의 총탄에 죽어야 하는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긴긴 세월을 두고 한으로 남겨진 외마디소리 시작되어 지리산 긴 자락으로 슬프디슬프게 울려 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기절한 채 엎드려있던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논바닥에는 동네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고, 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1954년 나는 10살에 금서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김덕곤, 김창곤, 민건호 선생님 밑에 공부하다가 방실로 다시 돌아가는 바람에 중퇴하고 만다
운명은 아무도 거스를 수가 없다 천애의 고아가 되어 총 3발 맞고 살아나게 되어 천추의 한을 짊어지고 참혹한 시련과 모진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향학의 집념으로 살며 지혜를 터득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 희생자 유족회’ 회장을 맡아 방곡 추모공원을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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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패를 받고 있는 정재원 회장(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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