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명패로 얼룩진 권위의식

산청시대 2021-10-06 (수) 23:54 1년전 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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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일 / 전 창원시 마산합포구청장 

 

 

 

무슨 지역 현안 간담회에 초대되어 다녀왔다는 한 시민운동가가 쓴소리를 잔뜩 쏟아냈다. 사회적으로 명망 좀 있다 하는 이들의 명패가 상당히 위계적이고 고압적이라고. 나전칠기로 제작한 화려한 명패는 거만스럽고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것이어서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인식에는 ‘아직 봉건적 권위의식이 뿌리 깊게 깔려 있나’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더라는 것이다. 직위와 이름에 더해 양옆으로 용 문양을 아로새겨 넌지시 위엄을 과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오래전에 철폐해 시대적 시효를 다한 구태가 되살아난 것 같아 매우 씁쓸했다. 

 

그러니까 1995년 민선 자치 시대가 개막되던 해, 필자가 경남도청에서 사무혁신 시책을 추진할 때였다. 민주화 시대에 걸맞은 탈권위적 조직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도내 전 간부공무원의 명패를 일제히 없앴던 것이다. 당시 읍면동장을 비롯한 사무관급 책상 위엔 자개로 직위와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놓여 있었고, 서기관급은 직위와 이름 양옆에 용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부이사관급 이상은 용이 구름을 휘감고 승천하는 문양이 새겨졌고, 도지사의 명패는 그것도 모자라 하단에 무궁화로 장식돼 있었다. 

 

민주화 시대 탈권위적 조직문화 조성

경남 도내 전 간부공무원 명패 없애

진심 어린 태도·겸손한 자세가 권위  

 

더군다나 매년 보직변경이나 인사이동 때마다 새로이 명패를 제작 지급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 등을 감안할 때 예산 낭비도 대수롭게 보아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막상 도지사의 명패를 치우는 결정을 득하려니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으나, 그때 K 지사께서 “이 책상이 내 자리라는 걸 우리 직원들이 모를 리 없고, 내 방에 들어오는 사람이 내 이름을 모르겠느냐”며 흔쾌히 승낙했다. 

 

지방행정의 서비스 개선 일환으로 추진한 이 프로젝트는 사무환경 혁신과 능률향상 장려정책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여파인지 모르겠으나 용인·구리·양산시장을 비롯한 몇몇 자치단체장들은 집무실을 북카페와 시민 문화공간으로 개조하는 등 탈권위주의 행보로 눈길을 끌고 있는 가운데, 최근 경찰청에서는 일선 경찰관서장의 집무실 입구에 부착된 지휘관 표지(계급장)와 참모기(계급장 깃발)는 물론 회의실에 게시된 역대 청장 사진을 모두 떼어냈다고 했다. 낡은 관행과 불필요한 형식을 제거함으로써 시민의 안전이라는 경찰 본연의 치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책상 위에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고 쓰인 자그마한 패가 놓여 있었다. NATO 결정, 미군의 6.25 전쟁 참전 지시,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단행한 고용 평등 강화 조치로 흑인들에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등 세계사의 운명을 다룬 숱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 문구를 되새겼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사상과 마음가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참된 공복’, ‘올바른 지도자’는 어떤 모습,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권위를 앞세우지만, ‘권위 있는 사람’은 권위를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어 둔다는 말이 있다. 지나온 삶이 권위요 사람을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와 겸손한 자세가 권위이기 때문이다. 거추장스러운 명패 대신 공복으로서의 직임에 대한 소명과 각오 한마디씩 써 붙여놓으면 어떨까. 

 

‘낮추면 더 높이 보이고 수그리면 더 멀리 보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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