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행복한 가을의 복판에서

산청시대 2021-10-21 (목) 12:35 2년전 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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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식 / 산청한방약초축제 집행위원장 

 

논바닥은 온통 황금색이라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다. 군주 시대의 후덕한 임금이 만백성을 위하여 잔치를 벌이려는 듯한 환상적 분위기에 빠진다. 푸른 소나무숲 아래 여기저기서 밤송이가 가슴을 터트려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견인하더니 릴레이 하듯 떫은 감도 황금색 자태를 뽐내며 얼굴을 내민다. 밭 귀퉁이마다 되는대로 심은 호박은 추석을 넘기더니 뒤질세라 너도나도 노란 꽃으로 수줍게 미소지며 알까기에 여념이 없다. 고라니가 먹어치운 잎사귀가 다시 짙어지기도 전에 캐는 고구마는 알이 굵을 리 없고 땅끝까지 뿌리를 뻗어 호미 끝만 삐거덕거린다.

 

탄저병으로 겨우 두 번 따고 뽑아낸 고추는 포대가 가득할 리 없고, 그 이랑에 대충 심은 무 배추는 가뭄 통에도 벌레들의 향연은 하늘을 찔렀으니 게으른 농사꾼은 이래저래 조롱당했다.

어찌 농사를 운칠기삼(運七技三)에다 들이대랴.

화내면 지는 법. 갈아 뒤집고 다시 심은 무, 배추는 오늘도 조마조마하다. ‘무농약 자연농법’ 

아내가 정해준 신조에 매몰된 내 농법은 서서히 무기력해간다. 잡아도 잡아도 다 잡히지 않는 교활한 배추벌레와의 전쟁에서 무릎을 꿇기 직전이다. 내 허리도 살고 봐야 하니까.

 

10년하고도 3년째 농사꾼. 알아서 짓는 게 아니고 남 따라 지으니 잘 될 턱이 없다. 잘 되는 게 비정상이지. 그래서 내가 붙인 ‘농사시보’(農事試補)는 떼고 싶지도 않지만, 영원히 딱지를 못 뗄 판이다. 저들한테 물어보지 않고 내 좋아서 뿌렸어도 군말 없이 제 힘껏 자라주는 녀석들은 나의 스승이자 충성스러운 친구이다. 농부의 마음을 비틀며 시기하는 뒤죽박죽이 된 넝쿨과 이름도 기억도 없는 풀꽃과 새들과 벌레들. 이것들의 약 올림과 앙큼한 미소도 나의 아침을 함께 밝히는 뺄 수 없는 동반자이다. 전원의 행복이 그것이기에, 그 행복에 빠져 한증막보다 더 뜨겁게 진땀을 쏟기도 하고 무지한 인간이라고 비웃으며 진드기와 벌레가 깐죽거린 내 피부는 기가 막히고 그놈들의 정체를 알지 못해 이따금 부들거린다. 그놈들의 정체를 안 들, 코로나바이러스의 정체를 알았던들 그게 무슨 소용이람. 인간은 자연 앞에서 잠시 똑똑한척하지만 비웃음당하는 갓 똑똑이 인 것을.

 

아침 안개가 끼는 날의 한낮은 덥다. 오늘 아침에도 안개가 내려앉더니 이 시간 들판을 마주한 햇빛은 마냥 강렬하고 황금색 카펫은 더 주황색으로 중후해간다. 눈 깜작할 사이에 이 아름다운 이 풍경은 사라지고 환상의 오색단풍이 그 위쪽에 병풍을 드리워 허전함을 다시 채워 줄 것이기에 걱정할 것도 없다. 그새 배추벌레와의 한판 전쟁도 끝날 것이고 속 찬 배추 알은 오동통 허벅살이 오르고 미인의 종아리보다 더 희멀건 무 뿌리는 저 높고 깊은 코발트색 하늘 속에 새털구름과 함께 그림자를 남기겠지. 그러다 괜스레 옛날 생각이 나면 절로 헤픈 웃음이 참을려도 나오고 누가 들을세라 두리번거리는 사이 금방 허공으로 날아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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