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 산들바람

산청시대 2022-09-19 (월) 01:38 1년전 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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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식 / 산청한방약초축제위원회 위원장

 

감질나던 장맛비가 찔끔거리며 스치더니 뭉게구름 사이로 붉은 해가 이글거리며 온누리를 집어 삼킬듯 내려쬔다. 빛이 강해 그늘이 짙어진 느티나무 밑에는 노쇠한 남자들이 살빠진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이리저리 편한대로 앉고 누워서 빌어먹을  정치 논쟁으로 열을 올리고 기와얹어 근사한 육각 정자에는 허리 굽은 늙은 아낙들이 늘어진 가슴을 감싸고 딩굴거리며 시시콜꼴한 남의 집 개인사를 끄집어 내어 잘게 쪼개고 부풀려서 말꼬리를 쉼없이 이어간다. 쉴틈도 없고 빈틈도 없이 심고 뿌린 농작물은 삼복더위를 거치면서 하루하루 크기가 다르고 결실을 앞둔 마지막 자태에서 특유의 향기를 한껏 뿜어낸다. 칼칼한 고추 붉는 냄새, 톡쏘는 들깨냄새, 구수한 벼이삭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농부의 코끝에 와 닫는다.

여름을 장식하는 비와 햇볕의 지겨운 경쟁은 가을 결실을 위한 시간이였고 그 경쟁의 조화로움에서, 사람 배를 채울 곡식 알갱이들은 더 튼실하고 잘 여물게 되어있다. 비와 햇볕의 적절한 조화가 그렇게도 중요하거늘, 작은 한반도 그 중심부에는 수십년만의 물폭탄을 도심에 퍼부어 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갔지만 그 아랫쪽은 반대로 비가 부족해 안달을 하다가 어찌저찌 늦게나마 자연의 조화에 힘입어  풍작을 예고하듯 건강하게 자란 벼들이 앞 다투어 피어 오른다.

좁은 세상이지만 희비가 엇갈리고 사람사는 맛이 다르니, 세상은 고르지도 않고, 넓고도 좁다. 팔월 중순까지만 해도 가뭄과 폭염에 모두가 지쳤고 농부들은 애가 타들어 갔다, 서산너머로 해가 잠길 즈음이되면  자연의 동작은 멈추고 땅에 내려쬔 열기가 거꾸로 치솟아 이름하여 열대야의 시간이 지배한다. 지구의 자전운동 고장인지, 신의 장난인지, 한점 바람기 없는 일단멈춤은 견디기 힘든 고통중의 고통 아니였던가.

인고의 시간도 지나고 보면 잠시, 어김없이 돌아가는 세월앞에 말복과 처서가 찾아왔다. 서산에 해 기울고 산 그늘이 내리면, 치솟던 열기는 땅속으로 기어들고 요술처럼 찾아온 산들바람이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만사가 귀찮아 포기하고 싶던 심신이 비로소 정상으로 호박되어 돌아온다. 잃어버릴 것 같던 나를 찾고 살 맛도 되찾았다. 자연은 위력은 역시나 위대하다. 그러나 공평하지는 않은것 같다. 세월은 다람쥐 쳇바퀴 처럼 돌고, 숨쉬고 살아갈  남은 세월은 짧은지라, 여름을 밀어내고 가을을 맞는것이 어찌 아쉽지 아니할까만, 이글거리는 햇볕과 숨막히는 열기의 억압에서 벗어나  내 의식을 되찾은 것이 더 시급하기에 반가울 따름이다.
산들바람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이자 결실과 월동을 조력한다. 지는 산 그늘따라  산새소리, 풀벌레들의 합창소리가 어우러져 귀청을 어지럽힌다. 밤새 한참동안의 적막을 깨고 안개가 걷히는 아침이 오면, 영롱한 이슬이 푸른 잎새 위에 초롱초롱 매달린다.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아마도 여름의 파수꾼 햇볕과 가을의 전령인 산들바람이 밤새 밀당한 결과물이리라. 자연이 주는 소리와 자연이 만든 모양은 언제나 정겹고 아름답다. 이글거리는 햇볕이 내일 다시 뜨거운 눈으로 행패를 부릴지라도 산들바람이 있음에 안도하며 기꺼이 극복하리라.

찌든 농부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번지고, 들판은 하루가 다르게 짙은 황금색으로 물들어간다. 쳐다보는 하늘은 더 없이 깊고 푸르며 떠도는 뭉게구름은 더 우아하고 변회무쌍한 춤사위를 벌리며 자유를 만끽한다. 사람사는 바닥 세상은 언제나 잡다하고 정치는 시끄러워도 농심은 언제나 소박하고 풍요롭다. 벌써 삼년이 다 되어가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직도 창궐하고, 인간의 무지함을 깔보고 있지만, 신명나는 풍년가 소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점점 가까이 힘차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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