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일기] 기러기

산청시대 2022-10-03 (월) 23:29 1년전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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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주 편집위원 / 법학박사, 전 진주경찰서장


바야흐로 가을이다. 이 계절이면 지나간 세월에 묻어 있던 여러 가지 상념의 편린들이 스물스물 피어났다가 희뿌연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곤 한다. 이때쯤 어둑한 저녁나절 툇마루에 앉아 남쪽 하늘 저편에 행렬을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들의 실루엣을 보고 있노라면 시절 인연의 분명함을 절감하게 된다. 가을밤의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둥근 달과 기러기 행렬의 앙상블만 한 것이 없다. 여기에 가늘게 퉁소 소리라도 더하면 감흥은 더욱 무르익는다.

삼국시대 백제에서는 기러기를 하늘과 지상을 왕래하는 신(神)의 사자로 여기고, 규합총서에는 기러기가 신(信)·예(禮)·절(節)·지(智)의 덕(德)을 갖추었다고 적혀 있어, 옛사람들은 기러기를 영물로 알고 상당히 예우했던 것 같다. 기러기는 암컷과 수컷의 사이가 좋다고 해서 전통 혼례 때에 나무 기러기를 전하는 의식이 있다.

기러기는 가을에 우리나라에 와서 봄에 시베리아로 떠나는데 날아갈 수 있는 거리는 약 4만km에 이른다고 한다. 기러기가 그렇게 먼 거리를 날 수 있는 것은 동료들과 동고동락하며, 힘들어도 배가 고파도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훌륭한 리더가 항상 길을 안내해주고 격려해주기 때문이다. 리더 기러기는 동료들과 소통하며 목표를 설정하여 주지시키고 위로와 격려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기러기 떼에서 리더는 모두가 리더이다. 비행하는 동안 리더가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기러기들은 모두가 번갈아 리더가 되지만 현재의 리더에게 복종하고 협조한다. 선두에 서야 하는 리더의 자리는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다. 진로의 방향을 잡아야 하고, 맨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받으며 가장 힘들게 날갯짓해야 하는 고생스러운 자리이다. 그 자리는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희생과 봉사, 그리고 헌신하는 자리이다. 비행을 계속하다가 리더가 지치면, 또 다른 기러기가 맨 앞으로 나가 기꺼이 무리를 위해 리더가 되어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리의 모든 기러기들이 리더의 자질을 갖추고 리더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독려한다. 그래서 리더 기러기가 유고를 당해도 그 뒤를 이을 능력과 에너지를 갖춘 기러기들이 언제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물러서야 한다고 판단되면 서슴지 않고 다른 리더에게 위양하고 물러난다. 그렇게 기러기들은 수천, 수만 km를 날아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잘나고 똑똑한 리더십보다도 헌신하고 봉사하는 리더십이 필요한 것 같다. 아픈 사람을 보면 같이 눈물 흘릴 줄 알고, 힘든 사람을 보면 보듬어줄 줄 알고, 나를 욕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큰 가슴으로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리더십 말이다. 서로 소통하고 화합하면서, 서로 배려하고 독려하면서, 기러기들의 군림하지 않는 지도력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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