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일기] 낙엽

산청시대 2022-11-02 (수) 00:15 4개월전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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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주 편집위원 / 법학박사, 전 진주경찰서장

 

지난해 대한민국 연극대상에 극단 베다의 ‘붉은 낙엽’(토마스 H. 쿡 원작)이 선정되었다. 원작 소설 <붉은 낙엽>의 스토리는 숲이 우거진 시골 마을에서 에이미라는 작은 소녀가 유괴당한다.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은 에이미를 마지막으로 돌봤던 열다섯 살의 중학생 키이스이다. 키이스의 아버지 에릭 무어는 점차 압박해 들어오는 경찰 수사와 마을 사람들의 편견에 찬 시선에 맞서 아들의 무죄를 증명해내야만 한다. ‘붉은 낙엽’은 어느 평범한 가족에게 닥친 위기를 통해 불신과 오해, 불완전한 추리의 파괴적인 성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추리 비극이다.

‘붉은 낙엽’이란 제목은 단순히 낙엽의 색상이나 상태를 묘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작품을 감상해 보면 그보다는 좀 난해한 함축성을 지닌 것 같다. 작가는 푸른 잎이 낙엽으로 변하는 생리적 메커니즘을 인간관계에 응용하려고 시도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봄이 되고 기온이 상승하면 나무뿌리가 수분을 빨아올려 ‘나뭇가지의 눈’(수아樹芽)으로 보내면 잎이 생장하여,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기온이 점차 내려가면 수분의 공급이 서서히 정지되고 푸른 잎이 단풍으로 변했다가 고사되어 낙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나무와 잎 사이에 의심이 생기고
신뢰 관계가 파괴되는 순간,
잎으로 가는 수분을 끊어버리면서
의심을 받은 잎사귀는 고통으로
다른 잎들보다 빨리 붉게 변하여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떨어진다


‘붉은 단풍’의 작가 토마스 H.쿡은 이러한 나무와 잎 사이의 메커니즘에 착안하여 나무와 잎 사이에 의심이 생기고 신뢰 관계가 파괴되는 순간, 나무가 잎으로 가는 수분을 끊어버리면서 의심을 받은 잎사귀는 번민과 고통으로 다른 잎들보다 빨리 붉게 변하여 결국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는 것으로 인식한 것 같다. 작품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품은 의심과 오해로 인해 초래된 비극적 상황을 다룬 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도 우정도 믿음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에서는 주인공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질 때 자기의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한다.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던 오 헨리는 떨어지는 낙엽에서 영감을 얻어 <마지막 잎새>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또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 <경관과 찬송가>에서는 낙엽을 ‘잭 프로스트의 명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늦가을에 내리는 서리의 명함이라는 것이다. 곧 낙엽은 겨울이 내미는 명함으로 차가운 겨울이 다가옴을 전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병주는 장편소설 <낙엽>에서 ‘고목(古木)에 꽃이 핀 기적을 보았느냐. 낙엽이 꽃잎으로 화(化)하는 기적을 보았느냐. 여기 그 기적이 있다. 낙엽이 썩지 않고 다시 생명을 얻었다’고 했지만, 낙엽의 애잔한 본성을 심미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이효석 작가는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수필에서 낙엽을 ‘꿈의 시체’라고 했다. 꿈 많던 찬란한 시절이 다 끝나고 이제는 퇴색해져 사라져 가야 하기 때문에 꿈의 시체라고 한 것 같다. 낙엽은 이처럼 ‘애이불비 애이불상’(哀而不悲 哀而不傷)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인 모양이다.

이러한 낙엽의 애상적 감흥을 소재로 한 비련(悲戀)의 노래들이 있다. 29세에 신장암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가수 배호가 부른 ‘파란 낙엽’의 가사는 비감(悲感)한 사연이 절절하다.
‘외로운 가슴에 파란 낙엽이 스쳐 갈 때, 울고 싶도록 그리운 당신’
파란 낙엽은 생명을 다하지 못하고 비바람 등 외부적 작용에 의해 떨어지는 잎새라 할 수 있다. 그의 노래는 대부분 슬픈 사연을 중후한 저음과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으로 심장을 녹이고 애절한 고음으로 가슴을 파고드는 울림을 주어 절정을 장식하면서 마무리한다.

또 한 곡은 바로 27살에 요절한 차중락이 부른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다. 이 노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 part of you’를 번안한 노래다. 가수 차중락이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고,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러 심금을 울리게 했던 노래다. 이 노래 가사는 참 애절하고 너무 아름답다.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가는 줄 왜 몰랐던가?’ 이 구절은 우리들 인생의 의미심장함이 녹아 있다.

이 구절은 이 노래 가사의 압권이자, 이 세상 모든 노래의 백미이다. 낙엽과 인연이 있는 가수 배호와 차중락은 ‘파란 낙엽’의 운명을 타고나서 ‘마지막 잎새’처럼 떠나간 비운(悲運)의 낙엽들이다. 두 사람은 때를 묻히지 않고 순수한 채로 홀연히 세상을 떠났기에, 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꽃으로 영원히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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