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누구를 위해 책을 쓰나
산청시대
2023-11-01 (수) 11:43
29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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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일 / 전 창원시 마산합포구청장 ‘좋은 글이 내뿜는 향기는 만대에 이른다’는 말이 있다. 사랑과 연민, 사람에 대해 고민하는 글을 쓰되 자가당착에서 벗어나 진실이 담긴 순수한 언어와 솔직하면서도 감성적인 표현으로 독자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고 살아갈 힘을 되찾게 할 때 의미가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라 했듯 글 한 편 쓰기가 그리 쉬운 일이던가. 글 속에 어떤 삶의 의미를 그려낼까. 주제와 무관한 군더더기는 없는가. 어휘는 적절하게 선택되었는가. 여운을 남기는 은은한 말은 없을까… 등 몇 날 며칠을 고심하며 퇴고의 과정을 밟지만, 공연히 어쭙잖은 글을 써서 경량의 허물을 스스로 드러내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기가 정말 쉽지가 않다. 이렇듯 각고면려(刻苦勉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스러운 일이 글쓰기이거늘, 한때 내로라하는 권세로 이른바 이름을 떨쳤으나 제법 타락까지 했다는 평판을 받는 위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터무니없는 책들을 마구 찍어내고, 출간 족족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런 그로테스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변명 일색이요 궤변만을 늘어놓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저자의 사상에 공명을 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비사(秘史)를 폭로하거나 위선적이고 선동적인 글은 잠시 쾌감을 느끼게 해줄지언정, 반드시 동티가 나고야 만다. 요근래 서점가에 쏟아져나온 회고록 또는 비판서라는 이름의 책자를 보더라도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하고자, 아니면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악마화해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심산이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결과는 파국을 맞았다. 괴담 유포, 2차 가해라는 비난과 사자명예훼손 등의 법적 분쟁에 휘말렸고, 흑과 백이 대결을 벌이듯 두 진영의 갈등이 서점가로 옮겨붙었던 문제의 서적에는 경멸과 날조의 상징어로 오염돼 사회적 지탄 대상이 되었다. 나라의 건전 지성과 올바른 정서 함양을 저해하고, 궁극적으로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이런 잡서(雜書)가 ‘자전적 에세이’로 포장되어 불티나게 팔렸으니, 선악이 모호해지는 집단 착란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게 아닌지, 실로 개탄스럽다. 문장의 거장 쇼펜하우어는 “사고하지 않고 기억과 추억에 의존하여 독자의 시간과 돈, 그리고 주의를 빼앗는 책자는 악서”라고 했고, 프란츠 카프카도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꽁꽁 언 사유의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실로 저자의 사색과 철학이 담긴 책들을 읽다 보면 그 속에 펼쳐져 있는 다양한 삶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또 그 시간을 통해 나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삶을 이끄는 힘을 얻거나, 마음에 온기가 더해지거나, 재미를 찾기도 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지식 문명의 등불이 되었고, 우리 내면을 풍성하게 해주었다.”고 하는 이유이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 무슨 내용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제각각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독자에게 성찰의 실마리를 안겨주거나 처세훈을 제공해 주지는 못할망정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독자를 기만하는 저급한 글로 책을 모독한다면 올바른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나. 정신에 독이 되고 마음을 흐리게 하는 악서는 마약만큼이나 위험한 독극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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