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가진 뜻 임금 앞에 개진하고, 처사로서 일생 마쳐

산청시대 2021-04-15 (목) 11:28 3년전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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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핀 산천재의 남명매

남명의 사후 벼슬을 올리고, 시호를 내리기 위해서 임금의 지시로 ‘행록’(行錄)을 지어 올리게 했는데, 선생의 제자 중에 배신(裵紳 1520~1573)이 지었다. 그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남명에게 ‘당신은 엄광과 비교해,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자, 남명은 ‘아! 자릉의 기절氣節을 내가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엄자릉은 나와 도를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 세상을 잊지 못한 자로,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최석기 <상계서>)

나가면 하는 일(유위有爲)이 있어야 하고, 나가지 않으면 지키는 것(자수自守)이 있어야 참 선비이니 결국 고고탁절孤高卓節한 처사로서의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조식의 처세, 출처관에 대한 논정은 세상에 나가지 않은 은일지사로,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고고하게 살아간 산림처사이다. 말하자면 유위有爲는 없고 자수自守만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식의 학문 사상의 전환과정을 보면 본래부터 출세를 거부한 것은 아니고 누구보다도 강렬한 유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출세 유위의 필수 과정인 과거시험을 준비하여 20세 때 이미 사마시 외 문과시에 합격한다. 물론 19세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인들이 꺾이는 것을 보고 심리적 갈등을 일으키지만, 결정적으로 출세의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숙부가 대과에 급제하여 출셋길이 열리니 사람들은 이제 조씨 가문이 흥운을 맞았다고 칭송을 했는데, 숙부는 기묘사화로 희생되고 아버지도 그 일당으로 몰려 억울하게 벼슬길에서 내쳐졌으니, 그 실망과 좌절은 강의한 조식을 속으로 더욱 강인하게 단련하는 시험이 되었을 것이다.

조식의 출처관에서 출세유위를 버리고 은거퇴수隱居退守를 택한 것은 이러한 몰락과 좌절을 겪으면서 세상을 직시하고 조정의 실상을 꿰뚫어 본 통찰과 스스로를 경계한 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식의 세상에 대한 실망은 반대로 조식을 고고탁절한 기상으로 끌어올리고 거기서 만물을 부시하는 고오함을 길러내는 충동력이 되었다. (<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 김충열)

남명의 출처에 관한 인식은 ’엄광론‘을 통해 분명히 드러냈다고 할 수 있는데, 남명은 엄광처럼 성인의 도를 추구하는 인물로서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기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남명은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하면서 공자처럼 현실에 왕도정치를 펼 수 없어도 현실을 등지지 않고 국가와 민생을 걱정하는 자기 위상을 분명히 드러냈다.

따라서 남명은 허유許由 소보巢父처럼 현실 정치를 외면한 은일의 부류와 그 성향을 달리한다고 하겠으며, 또 도연명陶淵明과 같은 은일의 유형도 아니라고 하겠다. 남명은 엄광처럼 처사의 지절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공자처럼 현실 세계에 늘 발을 딛고 시선을 두고 있었던 유학자라 하겠다. 이를 맹자의 설을 빌어 논하자면, 남명은 성지청자聖之淸者인 백이伯夷처럼 현실 정치에 등을 돌린 것도 아니고, 성지화자聖之和者인 유하혜柳下惠처럼 아무 때나 출사한 것도 아니며, 성지시자聖之時者인 공자를 배우고자 하여 자신의 지절을 지키면서 현실을 잊지 않는 인물이라 하겠다. (최석기 <전계서>)

영조와 정조는 남명을 떠올렸다. 남명학파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경상우도의 많은 사족 가문들이 무신사건戊申事件, 즉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었음에도 왜 그를 떠올렸을까?
영조는 1737년 7월, 대신과 비국당상(備局堂上: 비변사의 통정대부 이상의 당상관을 일컫는 말. 필자 주)을 인견한 자리에서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1682~1759)가 경상우도의 기절 숭상의 풍습이 유폐(流弊 누적되어온 폐단)가 되었다는 말에, ‘남명의 굽힐 줄 모르는 기개와 절조, 풍모를 평하여 아름답다’고 높이 평가하면서 당시의 말류지폐(末流之弊. 근본정신이 쇠퇴해버린 말세의 타락한 풍속)가 더욱 염려스럽다 하였다.

또한, 1765년 7월에는 우의정 김치인(金致仁 1716~1790)이 경연에 입대하여, 영조에게 유술儒術을 숭상 장려하는 도리에 대해 아뢰자 ‘지금 세상에 책을 읽는 선비는 어찌하면 옛날 조식과 같은 자를 얻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사람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남명에 대한 영조의 두둔은 단순한 칭송의 의미도 있겠지만 당대 벼슬아치들의 학문과 기절에 대한 불만과 분발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조 또한 남명에 대한 인식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1796년 8월 13일, 정조는 문정공 조식에게 사제(賜祭 제문을 내리다)하면서 ‘문정공 조식은 규모와 기상이 나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서게 하고, 완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청렴해지도록 할 만하였으며, 능히 심오한 경지에까지 나아가 지킨 바가 탁월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시들해지고 퇴폐해진 풍속에서 어찌해야 문정공을 오도록 하여 이를 연마 시키는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논어> 자한편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이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겠다.’ 했으니, 여기에 적절한 언급이라 하겠다. (남명학연구원. <남명학과 현대사회> p117)

선생의 출처편은 여러 선임 연구자들의 결과물에서 인용하여 그 출처의 대강을 밝혔다. 명종실록에서 사관이 선생을 평가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끝맺는다.

당시 유일遺逸에 가탁하여 실제 학덕을 갖추지 않고 한갓 허명으로 기세도명欺世盜名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식은 지신수결持身守潔하여 초야에 묻혀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관직이 누차 제수되었는데, 안빈자락安貧自樂하여 끝내 출사하지 않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러나 식은 결코 세상을 잊지는 않았다. 진소항의陳疏抗義하여 시폐時弊를 극론함에 있어 그 말이 간절하고 의義가 올바르게 하였고, 시대를 상심하고 난亂을 우려하여 임금을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 풍화風化를 왕도의 극치에 두려 하였으니, 우국지성이 지극하다. 오호라! 평소의 가진 뜻을 임금 앞에 다 개진하고 끝내 처사로서 일생을 마치니 그 절의는 높다 하겠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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