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폭포’에서 푸른 학(靑鶴)을 바라본 남명 선생

산청시대 2021-04-27 (화) 22:25 2년전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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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폭포(하동군 누리집)

문득 중천 선생이 “누가 이번 답사기를 써보지” 한다. 내가 설석규 선생을 보고 “설 선생은 전에 와보신 적도 있고 연구하신 바가 깊으니, 적격입니다”하였더니 끝내 사양한다. 중천 선생이 “본 손인 조 선생이 써보시오” 하므로, 얼떨결에 “예, 그렇게 해보지요”하고 대답해버렸다.
이 무슨 실수란 말인가? 마음속의 욕심이 저절로 울어 나왔던가! 재주는 요량 않고 경솔한 결정을 해버렸다. 두 달을 머릿속에 구름 낀 것처럼 지내다가 양 국장의 독촉을 받고 밤을 새워 이 글을 썼으니, 행인가 불행인가?

이야기하다가 주위 산천을 둘러보다가 얼마를 가는데, 큰 바위에 환학대(喚鶴臺)라 쓴 글씨가 보인다. 고운 선생이 학을 불러서 타던 바위인 것이다. 이른바 지금으로 치면 자가용 헬기장이다. 옛날 선비들은 집에서 학을 기르는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기도 했단다.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같은 선비도 학을 길렀다지 않는가. 고운 선생은 신선의 경지에 노시던 분이라 어디를 가고 싶으면 학을 불러 자유자재로 노닐었겠지.
이곳을 지나니 조릿대와 잡나무 숲이다. 다른 세상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조금 더 오르니 갑자기 시야가 시원하게 터지면서 한창 만개한 큰 목련 한그루가 나타난다. 만 장의 편지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인가. 찬란한 꽃송이들이 미풍을 만나 떨고 있다. 아직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나라, 어쩌면 선계에 왔는가? 정신이 황홀해진다. 나는 여기까지 오는 길의 산 벚꽃도 좋았지만, 난데없는 현란함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중천 선생은 벌써 절구 한 수를 지어 낭송한다.

靑鶴山庄 청학산장
地僻烟霞閒(지벽연하한)
깊은 산 연하는 한가하고,
鶴歸松石寒(학귀송석한)
학이 돌아간 뒤 송석이 외로워라.
三杯不老酒(삼배불로주)
불로주 석 잔으로 지친 몸 일으켜,
强我續登攀(강아속등반)
선인의 발길 따라 산행을 계속하네.

중천 선생은 뒤에 ‘지리서남팔영’(智異西南八詠)을 서시와 함께 아홉 수를 지어 <남명원보>에 발표했다.

여기가 불일 평전이다. 봉명산방(鳳鳴山房)이라는 현판이 걸린 휴게소가 있다. 청학산장이라고도 한단다. 불로주라 부르는 약주와 차를 파는 사람이 살고, 산장 뒤쪽에는 소망탑이라 쓰인 돌탑 여럿이 쌓여 있다. 무슨 소망이 있어서 저렇게 탑을 쌓았을까? 쉬는 사이에 불로주를 권한다. 한잔을 마셔보니 벌써 학이 되어 훨훨 날아 오를 것 같다.
일어나 조금더 올라가니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울려온다. 속진이 묻은 정신을 깨라는 경고다. ‘불일 폭포’에 다달은 것이다. 문득 신선이 되려다가 속세로 돌아온 듯. 나에게도 그리운 사람이 있을진대, 청학동으로 영영 들어가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속계의 사람이 되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쩐 일인가? 이상을 좇고 희로애락을 넘어서 해탈하는 것보다는 부대끼고 고뇌하는,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이 인간답지 않겠는가?
여기서 200m 가량을 밧줄, 사다리, 철책에 의지하여 타고 내려갔다. 건너편 하늘 꼭대기에는 어디서 왔는지 물줄기가 공중을 가르며 밑을 알 수 없는 구렁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져 내려간다.

다시 노 선생의 <유두류록>을 보자.
‘바위로 된 멧부리가 허공에 매달린 듯 내리뻗어서 굽어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서 높고 가파르게 서서 서로 떠받치듯 찌르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향로봉香爐峰이고, 서쪽에 푸른 벼랑을 깎아내어 만길 낭떠러지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비로봉毗盧峯이다. 청학靑鶴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어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다가 하늘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곤 했다. 그 밑에 학연鶴淵이 있는데 컴컴하고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우옹을 돌아보면서 물길이 만 길 구렁을 향해 내려가는데 곧장 내려만 갈 뿐 다시 앞을 의심하거나 뒤를 돌아봄이 없다 하더니, 여기가 바로 그런 곳이라고 하니 우옹도 그렇다고 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쾌하였으나 오래도록 머물 수는 없었다.’(우옹愚翁은 이희안의 자이다.)

학은 천년이 되면 푸른 빛으로 변한다 한다. 노 선생은 그 학을 본 것이다. 그 뒤로 사백 년 되는 세월도 흘렀지만, 세속에 때 묻어 맑은 정신을 지니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이 그 푸른 학의 자취나마 찾는다는 것은 애당초 가당치도 않은 것이니, 마음을 편히 가지고 돌아가야 할 일이다.
만일 주야도 안되는 총총한 시간이라 마치 꿈에 본 것처럼 지나와 버리고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은 현실 세계가 부조리한 것을 보면서 이상세계를 추구해 왔을 것이고, 그러한 노력 때문에 인류 사회는 조금씩 발전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옛 어른의 길을 따라가 보는 것은 그분들이 찾아서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 그것을 뒷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것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여행은 여기서 접지만, 노 선생 당시는 악양에서 삼가식현(三呵息峴 악양에서 적량으로 넘어가는 고개, 삼아실재)를 넘어 정수역에서 자고, 옥종과 수곡의 경계가 되는 다회탄을 건너 각각 자기가 갈 곳으로 헤어졌다.

사람의 습성이라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잠깐 동안에 낮은 쪽으로 내려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도 그 사람이고 뒤에도 같은 사람인데, 전날 청학동에 들어가서는 마치 신선이 된듯해도 오히려 만족하지 않았고, 은하수를 걸터타고 하늘에 들어가거나, 학을 부여잡고 하늘 높이 올라가 문득 인간 세상에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였다.
높은 산과 큰 내를 보면서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유한(韓惟漢), 정여창(鄭汝昌), 조지서(趙之瑞) 등의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견주어본다면, 10층 산봉우리 위에 다시 옥(玉) 하나를 더 얹어놓은 격이요, 천 이랑 물결 위에 둥그런 달 하나가 비치는 격이라 하겠다. 바다와 산을 거치는 3백 리 여정 동안에 세 군자의 자취를 하루 사이에 보았다.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니, 산중에서 열흘을 지내면서 마음속에 품었던 좋은 생각이 하루 만에 언짢은 생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후세의 재상이 된 이가 산수를 구경하러 이 길로 와본다면 슬픔으로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는가?

<유두류록> 말미 부분의 말씀을 적어 맺는 말을 대신한다.
‘이제는 조롱박처럼 시골집에 하는 일 없이 칩거하며 걸어 다니는 하나의 시체가 되어버렸다. 이번 걸음은 또한 다시 가기 어려운 걸음이었으니 어찌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는가?’
 
※붙임 : 이 글은 2003년 남명학 연구자 여러분과 <유두류록> 코스를 답사하고 쓴 글이다. <남명원보>에 실었던 글인데 조금 수정하여 싣는다. 이미 고인이 되신 김충렬 선생과 안동 국학 진흥원, 경북대학교에 계셨던 설석규 선생의 명복을 빈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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