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객정에서 대취한 덕계, 면상촌에서 말에 떨어져

산청시대 2021-05-13 (목) 10:38 2년전 1547  

덕계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여 11세에 부친상을 당한 이후 다섯 번을 상을 당했다. 탈상 후에 결혼하고, 남명 선생을 찾아 집지했다. 대과에 급제하고 54세에 별세할 때까지 벼슬길을 들락거릴 때 수시로 남명 선생을 찾아뵈었다. 그런 중에도 안의安義의 어느 곳에 우거할 생각을 했기도 했던 것 같고, 사제 간에 의론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남명집에 이런 편지가 있다.

‘지난봄에 안음安陰으로 찾아가 터를 잡은 곳의 시내 앞을 지난 적이 있는데, 터가 좋지 못해 깃들어 살기에는 부족하다고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위아래로 인적이 끊어지고, 농사지을 손바닥만 한 땅도 없어 더욱 거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전에 세운 계획을 철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남명집> ‘또 자강에게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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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구정으로 송객정은 인근에 있었다 전해진다. 사진/ 민영인


1570년 선생 50세 8월, ‘어사 겸 재상경차관’(御史兼災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진산군珍山郡의 전세田稅 일부를 감면시켜 줄 것과 순천부順天府 돌산도突山島 목장에 농사짓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계청하고 조세포탈租稅逋脫과 군역회피軍役回避 등 고질적인 폐단을 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남명 선생은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일찍이 조보朝報(승정원에서 전일 처리된 일을 기록하여 매일 아침 공포하는 관보官報를 말한다)를 보고, 자강이 건의해 밝힌 바가 많음을 알았습니다. 나라의 큰일은 국방을 튼튼히 하고, 식량을 넉넉히 하는 데 불과합니다. 포조逋租와 포졸逋卒에 대해 백년 동안이나 막혀 있던 것을 터놓았으니, 공과 같은 사람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이 일이 묘당廟堂의 계책에서 나오지 않고, 6품 언관言官에게서 나온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재상은 하는 일 없이 자리나 채우고 있으니, 따질 것도 없습니다.’ <남명집> ‘자강 자정에게 줌’

지막리에 가면 춘래대春來臺가 있다. 남명 선생이 덕계를 만나러 가면 밤머리재를 넘는 첫 마을 석답촌(지막리)에서 만났을 것이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마치 봄이 온 것 같았을 것’이다. 덕계를 산천재에서 작별할 때 특별히 진교촌(陳橋 덕교德橋)까지 바래다주고 ‘송객정’ 정자나무 아래서 전별주를 나누고 작별했고, 면상, 명상(面上, 面傷, 明上), 노각정老脚亭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삼장사三藏寺(덕계집에는 덕산사로 되어있다. 삼장사는 평촌리에 있었고, 덕산사는 대포리에 있다.), 단속사斷俗寺, 지곡사智谷寺 등에서 강회講會(학술회의)가 있을 때마다 덕계는 참석했고, 특히 지곡사의 강회는 덕계가 주도했다.

1564년 7월, 성산星山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선생이 승려에게 편지를 부쳐 삼장사로 오라고 하였다. 분부를 듣고 즉시 갔더니, 선생은 도착한 지가 이미 며칠이나 되었다. 혼미하고 게을러 깨우침을 받기에 부족한 줄을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공경히 가르침을 받들어 감발感發되는 것이 실로 많았다. 문하에 들어간 지 십 년 동안 직접 배운 날은 적고 물러 나와 혼자 있을 때가 많아, 열흘 추웠다가 하루 햇볕을 쬐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닌 것이 유독 한스러웠다. <덕계 일기>

1566년 정월 지곡사에서 5일간 강회가 열렸다. 덕계가 살 곳으로 자리 잡은 세 곳을 둘러보고 서계가 가장 좋다 하였다. 이 강회에는 함양, 산음, 거창, 단성의 선비들이 모여들어 밤에는 잘 곳을 나누어 자기도 했다. 각 고을 현감들도 찾아와 문안하였다. 남명 선생은 정월 10일 지곡사에 도착하였다, 14일은 덕계의 초정草亭에서 자고 덕산으로 돌아왔다. 그때 정경을 덕계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함께 조반을 들었다. 다리 가에서 전별주를 석 잔씩 마셨다. 다리를 건너서 선생은 말에서 내려 한참을 돌아보셨다. 할 말이 남았는 듯, 마치 가인을 작별하는 것 같았다.’
 
이 해(1966년) 8월에 남명 선생을 ‘상서원 판관’(尙瑞院 判官)에 제수하고 교지를 내려 불렀다. 교지에 “근래에 경상도 관찰사 강사상姜士尙이 올린 장계를 통해 늙고 병들어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허전하노라. 내가 불민하여 현자를 좋아하는 정성이 부족하므로 이와같이 된 것이니, 또한 부끄러워 할만하다. 올라온다면 마땅히 약제藥劑를 내릴 것이니, 모름지기 늙고 병든 것에 구애되지 말고 형편에 따라 잘 조섭해서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전에 조정에서 경학에 밝고 행실이 깨끗한 선비로서 성운成運, 이항李恒, 임훈林薰, 김범金範, 한수韓修, 남언경南彦經 등 여섯 사람을 대규모로 불렀다. 의론하는 자들이 산림에 있는 현자로서 조식曺植 만한이가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다시 이와 같은 명이 있은 것이다. 이에 선생이 부름에 응하여 자신의 말을 타고 길에 올랐다. <남명집> ‘편년’

10월 1일 도성에 들어가 3일에 주상이 사정전으로 불러 만났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묻자, “임금과 신하 사이는 정의가 서로 들어맞아 아무런 틈이 없어야만 정치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또 학문하는 방법에 대하여 묻자, “임금의 학문은 정치를 하는 근본인바, 그 학문은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또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관한 일을 묻자, “반드시 영웅을 얻어야 한나라 왕실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세 번까지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남명집> 편년

그때 덕계 오건과 약포 정탁이 서울에 있었는데, 선생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한강에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 사은숙배謝恩肅拜할 때에는 두 분이 막사를 마련하고 함께 곁에서 모셨다. 11일에 사임하고 돌아오면서 한강을 건너는데, 전송하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배 두 척에 가득 찼다.’ 했다.

불행히도 덕계 선생은 그의 스승 사후 2년 만에 세상을 떴으니 스승의 학문을 잇는데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사제지간의 유별난 정을 느끼게 한다. 덕교의 송객정에서 전별주를 과하게 마시고 명상마을에서 낙마하여 얼굴을 상했다고 마을 이름이 면상面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진교촌에서 작별하고 돌아보면서 말을 타고 가다가 면상 마을에서부터는 스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으로 얼굴을 위쪽으로 돌렸다고 해서 ‘면상’面上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옛날 오덕계가 스승에게 찾아왔다가 돌아갈 적에, 남명 선생이 10리 밖 큰 나무 밑까지 전송을 나와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덕계는 취해서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었다. 후인들이 그 나무를 송객정이라 하고 그 마을을 면상촌이라 이름하였다. 나는 그 터를 돌아보고 배회하며 당시를 상상해 보았다. 그 상쾌한 청풍이 예전처럼 소매 속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얼굴에 상처를 입은 그 멋을 누가 알겠는가? (노백헌 정재규 <두류록>(頭流錄), 최석기 <남명과 지리산>)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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