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객정에서 대취한 덕계, 면상촌에서 말에 떨어져덕계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여 11세에 부친상을 당한 이후 다섯 번을 상을 당했다. 탈상 후에 결혼하고, 남명 선생을 찾아 집지했다. 대과에 급제하고 54세에 별세할 때까지 벼슬길을 들락거릴 때 수시로 남명 선생을 찾아뵈었다. 그런 중에도 안의安義의 어느 곳에 우거할 생각을 했기도 했던 것 같고, 사제 간에 의론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남명집에 이런 편지가 있다. ‘지난봄에 안음安陰으로 찾아가 터를 잡은 곳의 시내 앞을 지난 적이 있는데, 터가 좋지 못해 깃들어 살기에는 부족하다고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위아래로 인적이 끊어지고, 농사지을 손바닥만 한 땅도 없어 더욱 거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전에 세운 계획을 철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남명집> ‘또 자강에게 답함’ 이 소식을 들은 남명 선생은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지막리에 가면 춘래대春來臺가 있다. 남명 선생이 덕계를 만나러 가면 밤머리재를 넘는 첫 마을 석답촌(지막리)에서 만났을 것이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마치 봄이 온 것 같았을 것’이다. 덕계를 산천재에서 작별할 때 특별히 진교촌(陳橋 덕교德橋)까지 바래다주고 ‘송객정’ 정자나무 아래서 전별주를 나누고 작별했고, 면상, 명상(面上, 面傷, 明上), 노각정老脚亭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삼장사三藏寺(덕계집에는 덕산사로 되어있다. 삼장사는 평촌리에 있었고, 덕산사는 대포리에 있다.), 단속사斷俗寺, 지곡사智谷寺 등에서 강회講會(학술회의)가 있을 때마다 덕계는 참석했고, 특히 지곡사의 강회는 덕계가 주도했다. 1564년 7월, 성산星山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선생이 승려에게 편지를 부쳐 삼장사로 오라고 하였다. 분부를 듣고 즉시 갔더니, 선생은 도착한 지가 이미 며칠이나 되었다. 혼미하고 게을러 깨우침을 받기에 부족한 줄을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공경히 가르침을 받들어 감발感發되는 것이 실로 많았다. 문하에 들어간 지 십 년 동안 직접 배운 날은 적고 물러 나와 혼자 있을 때가 많아, 열흘 추웠다가 하루 햇볕을 쬐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닌 것이 유독 한스러웠다. <덕계 일기> 1566년 정월 지곡사에서 5일간 강회가 열렸다. 덕계가 살 곳으로 자리 잡은 세 곳을 둘러보고 서계가 가장 좋다 하였다. 이 강회에는 함양, 산음, 거창, 단성의 선비들이 모여들어 밤에는 잘 곳을 나누어 자기도 했다. 각 고을 현감들도 찾아와 문안하였다. 남명 선생은 정월 10일 지곡사에 도착하였다, 14일은 덕계의 초정草亭에서 자고 덕산으로 돌아왔다. 그때 정경을 덕계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0월 1일 도성에 들어가 3일에 주상이 사정전으로 불러 만났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묻자, “임금과 신하 사이는 정의가 서로 들어맞아 아무런 틈이 없어야만 정치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또 학문하는 방법에 대하여 묻자, “임금의 학문은 정치를 하는 근본인바, 그 학문은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또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관한 일을 묻자, “반드시 영웅을 얻어야 한나라 왕실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세 번까지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남명집> 편년 그때 덕계 오건과 약포 정탁이 서울에 있었는데, 선생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한강에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 사은숙배謝恩肅拜할 때에는 두 분이 막사를 마련하고 함께 곁에서 모셨다. 11일에 사임하고 돌아오면서 한강을 건너는데, 전송하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배 두 척에 가득 찼다.’ 했다. 불행히도 덕계 선생은 그의 스승 사후 2년 만에 세상을 떴으니 스승의 학문을 잇는데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사제지간의 유별난 정을 느끼게 한다. 덕교의 송객정에서 전별주를 과하게 마시고 명상마을에서 낙마하여 얼굴을 상했다고 마을 이름이 면상面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진교촌에서 작별하고 돌아보면서 말을 타고 가다가 면상 마을에서부터는 스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으로 얼굴을 위쪽으로 돌렸다고 해서 ‘면상’面上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옛날 오덕계가 스승에게 찾아왔다가 돌아갈 적에, 남명 선생이 10리 밖 큰 나무 밑까지 전송을 나와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덕계는 취해서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었다. 후인들이 그 나무를 송객정이라 하고 그 마을을 면상촌이라 이름하였다. 나는 그 터를 돌아보고 배회하며 당시를 상상해 보았다. 그 상쾌한 청풍이 예전처럼 소매 속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얼굴에 상처를 입은 그 멋을 누가 알겠는가? (노백헌 정재규 <두류록>(頭流錄), 최석기 <남명과 지리산>)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