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10)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흔적을 찾아서

산청시대 2021-08-13 (금) 01:01 2년전 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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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당 곽재우 장군(의령군 누리집)

 

남명학파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인류사회를 광정匡正하려는 지사志士였지 나약한 서생書生은 아니었다.
나는 20대에 콜린 윌슨(1931~2013)이 24살 때 쓴 <아웃사이더>(outsider)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의하면 “태양계를 벗어나려는 동성動性 때문에 우주질서는 유지된다”고 한다. 수많은 선구자들의 세상을 개조하려는 노력이 없었으면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발전되었겠는가? 그러나 ‘완전무결 영원불변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추구되는 것이지 성취되는 것은 아니며, 과학이 아무리 발달 되어도 현세에 천국이나 낙원이 건설될 수 없다는 것’(조영식, 인류사회의 재건)임을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한다.

망우당 곽재우(1552~1617) 장군이 49세 때인 1600년(선조 33) 전년 2월 22일에 경상우도 방어사, 이해 9월 10일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제수하고, 제조사除朝辭(왕에게 사은 숙배를 면제함)하고 부임하라는 교지가 내려왔다. 이해 봄에 병으로 인해 교체해 주기를 청했다. 다시, 몸을 조리하고 직책을 살피라는 비답批答이 내리자 소를 올려 세 가지 물러나야 할 이유를 밝힌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뿐만 아니라 도산성島山城(울산성)을 수축하는 일에 두 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불허되자 항의하는 소장을 올린 뒤 그만두고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에 대사헌 홍여순이 거만하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중도부처中途付處의 어명이 내려 영암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뇌곡 안극가가 노량에서 송별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아마도 귀양이 풀려 돌아올 때인 것 같다.
一代無雙將(일대무쌍장) 한 시대의 둘도 없는 장군이,
三山有約人(삼산유약인) 삼신산에 기약한 사람 있다기에.
江湖數盃酒(강호수배주) 강호의 두어 잔 술을 드리오니,
鄕國獨歸身(향국독귀신) 고향으로 돌아가는 외로운 분이로다.

이광정(1552~1627)의 ‘창암유허비명’(滄巖遺墟碑銘)은 곽 장군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홍의 백마로 출몰하기 신과 같이하자, 교활한 왜적들도 그 하는 짓을 헤아리지 못했고, 이때는 대장 깃발을 세우고 저 때는 산림처사의 관을 쓴 채로, 홀연히 가고 홀연히 옴에 위무威武도 그 지키는 것(절조節操)을 빼앗지 못했다. 충성스러운 건의며 올곧은 논의를 거리낌 없이 해내어 꼿꼿하다는 조신朝臣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휘둘러도, 임금이 그 과도함을 성내지 못했다. 나가서 직무를 행할 적엔 우레 울리고 바람 몰아쳐 우주가 기우뚱거릴 듯하다가도, 돌아와 자취를 끊기에 이르면 소연蕭然히 강가의 한 어부였다. 그리고 그 평일의 행하는 바를 보면 확호確乎하게 순유純儒의 조행操行이었다. (이동환. <망우당 곽재우의 도학적 정신구조와 그 현실주의적 성향>에서, 망우당 전서 인용)

남명 선생이 공부한 자굴산 명경대를 찾아

2020년 4월 20일, 박병련 남명학연구원장과 정우락, 조옥환 등 남명학연구원 관계자, 윤호진 강정화 등 남명학연구소 학자들, 최구식 한국선비문화연구원장과 조창섭, 구진성, 박태갑 등 연구원 관계자, 남명선생 후손 조온환, 조정환, 조기성, 조두환, 조종명 등이 대규모 답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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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굴산 망경대를 찾아 나선 답사대


남명선생이 선고 판교공의 탈상 후 서울에서 상문차 온 친구 성우(1495~1546)와 지리산 유람을 마치고, 30세에 김해로 가기 전까지 2년 정도 공부한 곳인 자굴산 명경대를 찾기 위한 답사였다.

이상필 교수가 비정比定한 제1 장소, 조옥환 이사장이 예상하는 제2 장소, 정우락 교수가 답사한 제3 장소 세 곳을 두루 답사했다. 가장 확실한 단서는 ▲선생의 시 2수와 부합할 것, ▲공부할 때 숙식할 수 있는 사찰의 터가 있을 것, ▲해 뜨는 양곡暘谷을 향할 것, ▲바위 또는 절벽이 웅장할 것 등 몇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정우락 교수가 비정한 제3의 장소는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고, 정 교수도 스스로 자퇴하는 방향으로 처리가 되었다. 이제 두 곳이 의견이 팽팽하다. 귀로에 삼가에 들러 저녁 식사를 마치고 토론에 들어갔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의령군과 학자들에게 다시 용역 조사를 해서 결론을 내리기로 하고 그날의 행사를 마쳤다.
나는 그보다 10년쯤 전에 금천 장추남과 명경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의령군의 관광과 직원의 설명을 듣고 찾아간 장소가 상기 제1의 장소였다.

그 1년 뒤 이른 여름 어느 날, 외토 마을 용암서원에 들러 남명선생 동상 앞에 섰다. 이 동상은 봉산의 도촌 조응인(1556~1624) 후손 조찬용씨의 주선으로 세운 흉상비이다. 동으로 흉상을 세우고 비문을 돌에 새긴 것이다.
이 비의 명문은 특이하게도 남명선생의 어릴 적 친구인 전주 부윤 이윤경(1498~1562)에게 보낸 편지글 일부이다. 김해에서 아들을 잃고, 또 모친이 별세하자 삼가의 옛집(선친이 살던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끼니를 잇지 못하고 곤궁하게 살던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도 남의 무고로 고생하는 ‘부윤보다는 내 처지가 낫다’고하여, 당시의 안빈낙도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쉰 서너 살 때의 편지일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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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굴산 정상에 선 조종명 이사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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