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13) 서원 향사,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

산청시대 2021-10-07 (목) 01:05 2년전 2684  

f6e8d64f4e1dda45a34bd2ce0246d674_1633536
남명선생 묘소에서

전기前期에 서원에 들어와서 다음 날 새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향사다. 이런 향사도 예전보다 많이 간소화한 것이다. 옛날에는 이틀 전에 서원에 들어와 밖을 나가지 않았다. 당일에 향사를 하는 곳도 있다. 이를 진기?期라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최근의 편법이지 원래의 법은 아니다. 너무 법도에 모자라도 하는 것이 나은지? 차라리 안 모시는 편이 나은지? 생각은 해볼 일이다. 

 

덕천서원의 춘추 향사는 봄 가을의 중월仲月(2·8월) 중정中丁에 향례를 올렸다. 언제부터인지 계춘·추(季春秋3,9월)의 초정初丁에 향사享祀를 한다. 미리 망권望圈을 받은 집사관은 5일 전부터 3일간 재계齋戒하고 치재致齋하는 2일간은 오직 향례享禮 일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금한다. 부모상을 당하지 않고는 원문을 나가지 않는다. 진설陳設 성찬省饌등의 과정을 3일간 마친 향례 당일 축전 5각丑前 五刻에 행사를 실시한다. 행사는 전폐奠幣,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음복수조飮福受?, 철변두撤邊豆, 망예望?까지 하면 제례가 끝나지만, 제물과 여비를 나누어 드리고 외삼문(外三門 門樓)을 나가 전별하고 나면 여러 가지 수습 정리하는 일은 본손의 몫이다.

 

제사에 관한 인간의 생각은 동서양이 별로 다른 것이 없는 것 같다.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프레이저의 ‘금지’金枝(golden bough)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에 의하면, 곡물신穀物神이 매년 죽어서 매년 부활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에 씨를 뿌릴 때 그 곡물신에게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의 고대 조상도 마찬가지였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할 때 영고迎鼓, 무천舞天, 동맹東盟 같은 축제를 올렸다. 결국 농경이라는 먹고 사는 일과 제사, 정치가 함께 생활 속에 배어 있었다. 축제라는 말도 먹고 살게 해주는 대자연에 감사하여 경배하고 가무를 올리는 잔치라 할 것이다.

 

봉제사 접빈객과 관련한 두 집안 이야기

 

1) 10년 전쯤 일이다. 경북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장말손(1431~1486)의 종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침 그날이 부조묘 입제일이었다. 주인이 없어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종부와 종손이 제사장을 봐 왔다. 종손이 별세하고 차종손과 그의 어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 했지만 기분이 좋고 경건한 모습이었다. 너무 바쁘고 폐가 될 것 같아서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그 집 종부가 한사코 말려서 마루에 둘러앉았다. 

부조묘 제사는 초헌관은 종손이 하지만 아헌관이나 다른 집사는 타성이 할 수 있다. 제관이 얼마나 오시느냐 물으니 많을 때는 300명쯤 오신다 한다. 무더운 이 무더운 여름날 알 수 없는 엄숙함이 몸을 감싼다.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유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선생 서거 400주년 행사에 갔을 때 점심 먹던 생각이 났다. 제상에 올렸던 음식이 모두 반숙이라 비빔밥에 비린내가 나고 고기도 먹기가 역겨웠던 기억이. 그러나 대접을 하고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주인 모자의 모습은 평생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람 사는 법, 접빈객 말고 있겠습니까”

 

2) 역시 10년은 된 것 같다. 창녕군 고암면 계팔 마을의 김용태씨 댁의 이야기다. 이분의 호는 청천당聽川堂, 한훤당寒暄堂의 방후손傍後孫이라 한다. 이분이 조부를 모시는 서원을 짓고 봉안을 하는데 초빙되어 갔다. 행사를 일요일에 하는데 집안의 학생들을 동원해서 심부름을 하게 했다. 손 대접을 하는데 주인 왈 “우리 집에 반상기가 30불 밖에 없어서 타도(타군)에서 오신 분만 외상으로 대접하겠습니다. 군내의 손님은 겸상으로 대접하겠으니 양해하십시오.” 한다. 그때 청천당은 팔순이 넘었고 허리는 조금 굽어 있었다. 서원 지을 목재를 여러 해 동안 몸소 산에 가서 베어왔다고 들었다. 논이 80 마지기 정도 되는데 몸소 장비를 운전해 농사일을 한단다. 아침을 먹고 나왔더니, 그 마을의 전 도의원인 하씨 한 분이 “우리집에 구경하고 가십시오.” 해서 따라갔다. 한옥의 넓은 집 사랑으로 들어갔다. 상이 나오는데 일행  7명을 큰 상 세 개를 내어 대접했다. 각종 유물과油物菓와 육포肉脯, 어포魚脯 아름다운 가양주家釀酒였다. 일행이 칭송하자, “사람 사는 법이 봉제사 접빈객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며 “돈이 많아서 한옥을 지은 것이 아니고, 봉제사 접빈객하려고 집을 지었읍니다” 한다. 

 

‘법식 맞게 유지 계승하기 힘드는구나’

 

같이 간 일봉 권영달(一峯 權寧達)의 접객법도 유별났다. 손님의 원근에 따라 ‘은자’(銀子, 여비旅費)라고 정성 들여 쓴 봉투에 돈을 넣어드린다. 나는 5천원과 1만원이 든 은자를 받은 적이 있다. 아마도 타도나 서울에서 온 손님은 액수가 많았을 것이다. 경제 사정이 여의치 못해 지금은 폐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2년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서원의 여러 행사도 많이 소략해졌다. 채례采禮(대현을 모시는 향사가 아니고 명망 있는 선비를 제자들이 모여 제사드리는 기념행사)는 행사를 쉬는 곳이 많고, 향사도 원임과 본손들이 최소의 제관으로 행사를 하는 곳, 또는 5집사(3헌관, 집례, 축)만 망권을 내어 모시고 본손이 참여해서 행사를 하는 곳 등이 있다. 

집안사람들과 앉은 자리에서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했더니, 어떤 종인이 “앞으로는 이처럼 간략하게 합시다”고 한다. ‘아, 제도를 어느 정도 법식에 맞게 유지 계승하기가 이렇게 힘드는구나. 조금만 끈을 느슨하게 하면 풀어져서 법도를 잃으니 사람의 사는 풍속이 그만 흐트러지는구나’하는 생각으로 근심이 깊다.

강우江右의 본산인 덕천서원만은 다른 서원이 다 안 해도 해야 할 것이니 그 책무가 무겁다. 대현의 후손인 집안 종인이나 독자 여러분은 모두 어떻게 생각하실까? ‘종묘대제’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서원 향사도 세계유산으로 지정 보호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덕천서원의 본손과 원생들은 각오를 단단히 해서 지키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살기가 어려웠다. 배도 고프고 고생도 많았지만, 집안에 기제사가 있으면 메쌀(祭需米제수미)을 들고 큰집으로 갔다. 예부터 덕천서원에서도 메쌀 서 되씩 여재실의 불천위 제사에 보내고 있다. 

 

f6e8d64f4e1dda45a34bd2ce0246d674_1633536
단성 사직단 졔례

 

단성면 내원 주민이 지킨 우리 전통

 

2020년 5월 13일 단성 사직단에 귀한 손님이 왔다. ‘사직대제보존회’에서 <국조오례의>에 의해 제수와 제관을 준비해와서 법대로 행사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차질없이 진행하는 전문가들이지만 경건함이 배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궁궐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했다. 각 군현의 지방 관아에서도 동쪽에 성황당을 서쪽에 사직단을 배치해, 풍년과 주민의 태평을 빈다.

단성 사직단은 고려말에 처음 강성현江城縣으로 개명할 때 사직단을 축조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위패에, ‘현사지신縣社之神, 현직지신縣稷之神’이라 음각된 고졸한 글씨나 나무가 닳은 결이 나타나 년륜이 오램이 입증된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가 강점한 세월, 이어서 한국전쟁 전후의 혼란기에도 한해도 궐사한 적이 없다 한다.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 시냇가의 하천부지를 개간해서 제수로 쓰고, 방문 앞을 담요로 가려서 호롱불 빛을 차단하고 새벽에 제사 지냈다 한다. 아마도 사직단을 이처럼 잘 관리해온 곳이 또 있겠는가? 

단성면 내원리의 주민들이 지킨 우리의 문화 혹은 전통의 빛남.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하지 않는가? 공자는 시중(時中 그 시대에 딱 맞게)이라 했다. 변화하되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보존하는, 시중은 쉬운 것 같아도 쉽지 않다.

 

우리 것 보존이 인류문화 이끄는 힘

 

김경일이라는 분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내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러나 유학, 유교는 고루하지 않다. 꼰대가 아니다. 남명선생은 ‘물 뿌리고, 청소할 줄은 모르면서 천리를 논하지말라’고 했다. 유교는 형식이 아니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 그 김 교수는 ‘안중근과 서태지 그리고 장보고’를 공자의 대안으로 등장시켰다. 지금 모두는 융합(融合convergence)의 시대를 말한다. 이념 간 학문 간 국가 간 예술 간의 벽을 녹여서. 이 융합이 곧 시중이 아닐까? 그것을 우리 젊은이들이 해내고 있다.

 

서원을 버리지 않고 운용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 말고는 없을 것이다. 서원을 제사의 공간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수양의 공간, 문화의 공간, 인문학의 공간, 대화의 공간, 화해의 공간으로 활용하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가 아니라 공자가 말했듯이 시대에 맞게 활용해서 소홀하지도, 과민하지도 말고 공부하고 체험하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해서 실속과 형식을 겸비한 교육의 장으로 만들어가자.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공경하고 재계하는 잠언)에 “출문여빈出門如賓 승사여제承事如祭” 라는 말이 있다.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뵙듯, 일을 받들 때는 제사를 모시듯’이라는 뜻이다. 

이로써 옛사람의 봉제사 접빈객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단순한 접객이 아니고, 제사를 모시는 것이 하나의 의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생활이고 도덕적 가치이고 수양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인격체가 일반 시민이 되고 정치가가 될 때 우리가 바라는 유교의 목표인 대동사회는 이루어질 것이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정치
자치행정
선비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