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인의 문화 기행(17) 어둠의 공간이 문화유산으로 되살아났다

산청시대 2022-02-17 (목) 11:09 2년전 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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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전경 

 

사자(死者)를 위한 무덤은 죽은 사람을 땅에 묻은 곳으로 처음에는 주검(시신)을 보호하려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이후 점차 죽은 이를 기리는 기념물의 성격으로 바뀌면서 형식이나 양식들도 다양하게 변천되어왔다. 이러한 무덤의 외형과 부장품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생활 습관이나 시대상, 종교적인 신앙이나 믿음 등을 이해할 수가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의 왕릉(王陵)과 김해, 고령, 함안, 고성 등의 가야 고분들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 산청의 생초, 신안 중촌의 가야 고분이나 구형왕릉 등도 이미 그 역사적, 학술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연구와 보존을 통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더욱 빛나기를 바란다.

 

이 무덤 중 쉽게 보기 어려운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의 무덤이 산청에는 있다. 단구재(丹邱齋) 김후(金後), 삼우당(三愚堂) 문익점의 묘와 강국흥(姜國興) 묘역 등이다. 지난 1월 24일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회는 이 묘역 답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그동안 일반인들에게 거의 공개가 되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다행히 이 무덤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제공한 진주 강씨 관서공파 17세손인 (주)명보조경 강상수 사장이 길 안내자로 동행하며 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600여년 자리 지킨 강국흥 묘역 분묘 3기

 

묘역이 있는 곳은 산청군 생비량면 제보리 산39번지로 생비량면 하능 마을회관 앞에서 출발해야 한다. 생비량면사무소를 지나 생비량천을 따라 나란히 가는 20번 국도 옛길로 들어섰다. 하능(下陵)마을은 남쪽으로 솥실령 5봉이 가로막은 구릉지로 ‘능구지’(陵丘地)라 하여 ‘능곶촌’이라고도 불러왔다. 

 

여기서부터는 15분 정도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산 아래로는 관리되지 않은 대나무들이 밀림을 이루고 있다. 다시 밤나무 숲을 지나자 소나무가 에워싸고 있는 산등성이에 동향으로 놓인 묘역이 나타났다. 이 묘역에는 2011년 6월 23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76호로 지정된 3기의 묘가 축조되어 있다. 위에서부터 진주 강씨 강국흥과 부인인 보성선(寶城宣)씨 그리고 그의 넷째 아들인 강행(姜行)의 무덤이다. 

 

2011년 6월 경남도 기념물 제276호 지정

 

3기의 무덤은 산청에서는 보기 드문 평면 장방형(長方形)으로, 여말선초의 무덤 형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호석(護石)은 가장 아래에 납작한 지대석을 놓은 뒤 들여쌓기로 판석(板石)을 입수적(立垂積:세워서 둘러 쌓은 것)으로 마무리하였으며, 호석의 네 모서리 상단석(上段石)은 옥개석(屋蓋石)의 모양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주축선이 약간씩 좌측으로 틀어져 있다.

 

맨 위의 묘 장방형 봉분 전면(前面) 호석의 묘표(墓表)에 ‘成均生員姜國興之墓本晉州後贈兵曹參議’(성균생원 강국흥지 묘본진주 후 증병조참의)가 세로 다섯 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중간의 묘에는 ‘夫人寶城宣氏之墓生員內室’(부인보성선씨지묘 생원내실)로 기록되어 있고, 세 번째 묘는 지면의 기초석만 장방형의 묘지로 봉분 앞쪽에 세워진 묘표 앞면에 ‘贈嘉善大夫戶曹參判行之墓’(증가선대부호조참판행지묘)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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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흥 묘소 

 

산청은 진주 강씨 관서공파 세거지

 

진주 강씨 관서공파(關西公派)의 파조(派祖)는 관서대장군을 지낸 강원로(姜元老)이다. 강윤보(姜允輔)는 6세손, 고려 말의 인물로 강국흥의 조부가 되며, 도학에 대한 깊이가 있어 포은 정몽주 선생과 교우하였다고 한다. 강국흥의 부친인 강사근(姜思近)은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호는 어초자(漁樵子)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족보에 의하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객령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조 1년(1392)에 임신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좌윤과 개성 소윤을 역임하였다. 옥천(沃川) 선생안(先生案: 조선시대 각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 관명, 생년월일, 본적 등을 기록하던 책. 안책이라고도 함)에는 옥천 지주사(知州事)로 부임한 기록도 있다.

 

이 무덤의 첫 번째 주인공인 강국흥은 생몰연대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보성 선씨와 혼인하여 흠(欽), 명(明), 지(知), 행(行), 길(佶)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세종 12년(1430) 경술 사마시에 등과하여 감찰사, 통덕랑, 장령 벼슬을 거쳐 대언(代言: 승지)을 역임하였다. 사후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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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능마을 

 

세종 때 등과, 승지·병조참의 지낸 강국흥

 

아들인 강행(姜行 1395-1470)의 자는 성능(聖能)이고 호는 동호(東湖)로 단성 문 씨와 혼인하였다. 단종 즉위년(1450)에 경오추장(庚午秋場) 사마시에 급제하여 주부(主簿)가 되었고 세조 3년(1457)에 원종3등공신(原從3等功臣)의 녹훈을 받았다. 영천, 의성, 청도, 파주, 광양 현감을 지내고 세조 13년(1467)에는 구성군 이준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다. 문집으로는 <동호집>(東湖集)이 있고 가선대부 호조 참판 겸 의금부 동지사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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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문화유산해설사

 

이번 답사에서 아쉬움은 비록 이곳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도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마을에서부터 산 아래까지 어디에도 안내판 하나 없었다. 또한 유일한 묘역의 표지판은 쓰러져 방치되어 있고, 봉분도 야생동물에 의해 파헤쳐져 있었다. 후손들의 관리도 필요하지만-과거에 몇 차례 도굴의 흔적은 있었다고는 하나-아이러니하게도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워 축조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것 같다.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하능마을 입구 도로와 산 아래에 안내표지판 설치와 묘지로 가는 길의 정비가 시급히 요구된다.

 

민영인 문화부장

 

<참고자료>

-경남관광 길라잡이 <문화재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 유산 포털>

-산청군청 <마을지명 유래> 

-조병덕 <숙재집>(肅齋集) 권26, ‘강씨칠세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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