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22) 백운동白雲洞, 천하 영웅이 부끄러워할 바는…

산청시대 2022-03-01 (화) 22:38 2년전 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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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계류

‘백운동은 진주의 서쪽 50리 덕천강 강가에 있는데, 옛날 백운암白雲菴이 있던 터다. 수석水石의 뛰어난 경관이 동남東南 제일로 남명선생이 쓴 <두류록> 중에 ‘백운동으로 들어갔다.’라고 한 것이 이곳이다. 그 후 사람들이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之所, ‘천하제일천석’天下第一泉石(영남 제일 천 석으로 되어 있다), ‘용문동천’龍門洞天 등 18자의 큰 글자를 새겼다. 고종 때 이르러서는 경향의 고관과 선비들이 계를 결성하여 선생을 높이 우러르는 추모의 정성을 보이기도 하였다.’(<진양지>, <단성면지>)

<남명집>에는 ‘백운동에 1번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남명이 이 백운동을 세 번 유람하여 ‘삼유동三遊洞’이라고도 한다. 하달홍(1809~1877)의 문집에 보면 ‘다시 백운동에 들어가다. 남명선생이 일찍이 세 번 이곳에 들어오셔서 세속에서 삼유동이라 부른다’라는 시 제목이 있다. 그렇다면 남명이 58세 때 지은 <유두류록>에는 당시까지 ‘백운동으로 들어간 것이 한번’이라고 하였으니, 덕산으로 이사 오기 전에 한번, 이사를 한 뒤 두 번 백운동을 찾은 것을 알 수 있다.’(최석기 <남명과 지리산>)
 
손성모 씨의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에 의하면 이 백운동천에는 15곳의 명소가 있고, ‘백운동 7현’白雲洞七賢이라 부르는 19세기 학자들이 자주 다녔다 한다. 그분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단계 김인섭(1827~1903), ▲석범 권헌기(1835~1893), ▲만성 박치복(1824~1894), ▲소계 유도기(?~?), ▲월고 조성가(1824~1904), ▲사헌 하겸락(1825~1904), ▲동료 하재문(1830~1894), 등 이다.
모두 19세기의 학자들로 진주, 합천, 하동, 산청의 명사들이다. 이들이 생존해 있던 동안 덕천서원이 훼철되고 그 복원을 보지 못한 채 남명선생을 그리워하며 백운동 공짜기로 들어가 선생을 그리워하며 소요하곤 했으리라.

물천 김진호(勿川 金鎭祜, 1847~1908)는 나이가 ‘백운동 칠현’보다 20세 정도 어리다. 때는 1893년 ‘산천재’에서 <남명집> 간역刊役 등의 일을 논의하다가 ‘백운동’에 이야기가 미치자 여러 논란 끝에, 바위에 선생의 흔적을 새기기로 하고 그해 단옷날 여러 선비와 백운동으로 들어갔다.
‘동구에는 손수 심은 고송古松이 있는데, 이제 선생이 돌아가신 지 322년이 지나도록 울울창창鬱鬱蒼蒼하여 엄연히 추위를 이겨내고 있다. 이는 마치 인인仁人 지사志士들이 병화兵火의 운수가 바뀌는 변란을 겪으면서도 강직하고 굳세어 꺾이지 않는 기상을 지닌 것과 같으니, 또한 우러러 공경할만하다. 아, 수석의 빼어남은 예전과 다름없고 장구杖?(지팡이와 신발)의 자취는 어제같이 선연하니, 만약 수간數間의 정자를 세워 이 골짜기 경치에 우뚝 솟게 한다면 후학들의 마음에 감발感發시킴에 다함이 없을 것이다. 근년에 이런 논의가 제기되었으나 이루지 못했으니 사람들의 마음 어긋남이 참으로 개탄스럽다…’(백운동각남명선생유적기 白雲洞刻南冥先生遺蹟記, 김정환 <산청문화> 8호).

‘그러나 우리로 봐서는 선생보다 너무 늦게 태어나서 이미 문하에서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추상열일秋霜烈日 같은 수연粹然한 모습을 우러러 뵙지도 못하였고,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반듯하게 하라는 뜻깊은 교훈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넣어두고 꿈속에 부쳐둔 것이 드러날 수 있게 되는 매개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손때 묻은 물건 하나를 보고도 흠앙欽仰할만 하며, 마음을 두어서 구경하신 곳을 하나라도 만나면 또한 그리워할 만합니다. 누항陋巷에 있는 샘에 정백자程伯子가 명銘을 지었으며, 주렴계周濂溪가 다니던 다리에 주부자朱夫子가 표지하였습니다. 이는 저절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그 책을 읽고 그 학문을 강습하는 자가 간혹 봄가을 날씨 좋은 때에 천석泉石 사이를 거닐면서, 정신을 드러내어 펼치기도 하고 성정을 읊조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의 물가에 이르러 갓끈을 씻기도 하며 높은 산을 우러러 회포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때 문득 바위에 새겨진 빛나는 모습을 보고 마치 궤장机杖을 잡은 채 모시고 따라다니는 듯하여, 각자 모두 쇄연灑然히 생각을 씻고 마음이 깨어나서, 완악頑惡한 사람을 청렴하게 하고 게으른 사람을 일어나게 할 수 있다면, 선생의 가르침이 진실로 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무익하다며 그만둘 일이겠습니까?’(물천 김진호의 학문과 사상,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백운동각남명선생사적기>)

물천은 남명선생이 바위에 이름 새기는 것을 나무랐다는 이유로 여러 선비가 반대하자, 정자를 짓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그 당위성을 이처럼 조리 있게 설명하고 마침내 여러 선비와 같이 백운동으로 들어가 ‘남명선생 장구지소’南冥先生杖?之所를 진로 폭포 위의 돌에 새겼다. 글씨는 극재 하헌진(1859~1921)이 썼다. 상기 선생이 심었다는 소나무는 백운동 입구(조사해보니 지금 입석으로 넘어가는 도로 옆에 있었다 하는데, 전쟁 시에 어떤 도벌꾼에 의해 없어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지금 이재근 군수에게 최석기 교수와 필자가 건의하였더니 ‘남명송’南冥松이라 하여 좋은 소나무를 구해 심겠다 한다. 고마운 일이다.

2001년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을 기해, 경남도에서 ‘남명학연구소’로 하여금 경남지역 남명 유적지 15곳을 선정하여 남명선생의 시詩를 돌에 새겨 설치했다. 백운동 입구 국도변에 ‘유백운동’遊白雲洞(백운동에 놀며)이라는 시를 새겨놓았다.

천하영웅소가수天下英雄所可羞 천하 영웅들이 부끄러워하는 바는,
일생근력재봉류一生筋力在封留 일생의 노력이 유 땅에 봉해진 데 있다네.
청산무한춘풍면靑山無限春風面 가없는 푸른 산엔 봄바람 부는데,
서벌동정정미수西伐東征定未收 서쪽을 치고 동쪽을 쳐도 다 이룰 수 없네.
 
‘옛날 한 고조 유방이 일등 공신 장량에게 제나라 땅 3만 호를 봉해주자, 장량이 ‘3만 호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사양하면서 ‘조그만 유留 땅만 봉해주시면 만족합니다.’라고 했다. 그는 나중에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전설 속의 신선)를 따라 놀았다.
이 시의 뜻은 큰 공을 세운 장량은 자기 공을 사양하고 물러날 줄 아는데, 천하의 영웅들은 사양할 줄 모르니, 여러 영웅이 장량의 처신을 보고서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는 뜻이다.
선생은 백운동을 찾아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줄 알았던 장량을 생각했다. 왜일까? 당시 조정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좇아 싸움질만 일삼고, 백성들의 궁핍한 삶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려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강동욱, <남명의 숨결>)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선생 자신은 천하를 경륜할 영웅의 뜻이 있는데, 뜻을 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피력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물천 김진호가 ‘남명이 장량의 일을 빌어 스스로를 탄식한 것’이라 한 것이 아니겠는가.
870년부터 1920년까지 50년간은 덕천서원이 없던 기간이다. 산천재에서 사성현과 남명선생 채례采禮는 근근이 올렸으나 본 손은 물론이고 선비들은 지향할 바를 몰랐다. 그때 ‘비석거리’(미수찬 신도비가 있던 곳)에는 유림 일부 세력이 서원을 지었으나 완공은 보지 못하고 동네 농민들이 농업부산물, 가축사료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고로古老들에게 들었다.

한편 ‘백운동’에는 덕천서원 원장을 지낸 조은 한몽삼(1589~1662)의 후손 우산 한유(1868~1911)라는 분이 남명과 관계가 깊은 백운동 점촌(지금 영산산장 건너편 산기슭)에 백운정사白雲精舍를 건립할 계획을 세워 추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졸했다. 그의 아우 항恒이 1919년 2월 13일에 개기開基하여 초가 3동을 지었다. 동재東齋는 완락재玩樂齋라 하여 강학의 공간으로 삼았고, 서쪽 건물은 관선실觀善室이라 하여 벗을 영접하는 장소로 삼았고, 중앙의 건물은 남명선생을 기념하여 경의헌敬義軒이라 칭하고, 전체를 ‘백운정사’라 명명하였다. (오이환의 ‘남명학파의 연구’에서 참조했음)
면암 최익현(1833~1906)과 간재 전우(1841~1922)의 고족高足인 흠재 최병심(1874~1957)의 기문이 있다. 정사의 모든 문건은 경상대학교의 문천각에 <우산문고>愚山文庫로 보관되고, 정사의 현판은 백곡의 ‘자양서당’에 소장되어 있다. 이 유서 깊은 정사는 1949년 여순사건으로 빨치산이 준동할 때 당국에 의해 태워졌다고 촌로들한테서 들었다.

남명선생이 여러 번을 답사하여 우거하려 했던 일, 덕천서원이 훼철된 후 산천재 곁에 서원을 짓고, 한우산이 백운동에다 백운정사를 지어 선생을 기념하려 했던 일들이 모두 남명학파의 성쇠와 관련이 깊으니, 마음이 수수愁粹롭다.
한우산은 ‘백운동’이라는 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산해선생백세사山海先生百世師 남명선생은 백 세의 영원한 스승,
권회욕로산지북卷懷欲老山之北 도를 거둬 품고 이 산 북쪽에서 늙고자 했네.
화산일반종상위華山一半終相違 화산의 반을 빌어 살려던 계책 어긋났지만,
소동안능용대덕小洞安能容大德 이 작은 동네가 어찌 큰 덕을 포용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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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각자석                                    남명선생 장구지소                              용문동천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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