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음’에서 제현과 함께 심·성·정 강론한 남명 선생
이날 밤 제현들과 함께 심心·성性·정情의 분변에 대해 강론하였다. 이튿날 선생이 갈천에게 ‘지난번 여기 왔을 때, 삼동三洞의 경치가 빼어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에 잊지 못하고 있었소’라고 말하자, 갈천이 ‘나도 또한 흥취가 적지 않소’라고 답하여 함께 삼동을 유람하였다. 원학동으로부터 장수동長水洞(심진동)을 거쳐 옥산동玉山洞(화림동)까지 갔다가 -절구 3수가 있다- 다시 갈천정사에 모였다가 하루를 묵고 돌아왔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갈천 임훈의 문인 역양?陽 정유명(鄭惟明, 1539~1596)은 갈천 고모부 진양인 정순 외손자다. 갈천 묘갈명을 지은 동계가 정유명 아들이다. 그리고 동계는 내암 정인홍(1535~1623), 한강 정구(1543~1620), 월촌 조목(1524~1606), 오리 이원익(1547~1634) 등을 사사師事하였다. 정인홍과 정구, 조목, 이원익 가르친 동계 ‘남명이 66세 때 첨모당을 만난 사실이 남명학파의 여러 기록에 남아 전하고 그 이전에 만나서 담화를 나눈 기록은 (<첨모당집>에) 전하지 않는다. … 이는 첨모당의 손자 임곡 임진부(1586~1658)가 남명이 절교했던 귀암 이정(1512~1571)의 증손서라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임곡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무민당 박인(1583~1640)이 편찬한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錄의 이정 부분의 기록 가운데 ‘음부옥사’淫婦獄事와 관련된 기록을, 일찍이 산삭刪削해 주기를 요청한 적이 있었고, 뒤에는 임곡 아들 임여백이 무민당 아들 박만(1610~1682)에게 편지로 간곡하고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 <남명집>에 귀암 관련 기록을 남긴 인물은 내암 정인홍인데, 정인홍이 무민당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임곡과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 임곡 집안의 처지에서는 <첨모당집>을 간행할 때 될 수 있는 한 남명과 관련을 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이상필, ‘첨모당 임운과 남명 조식과의 관계’ <남명학 연구>54집) 남명 66세 때 첨모당 만난 사실, 기록 남아 그에 앞서 <남명 선생 편년>에 의하면 63년 3월 ‘선생이 각재 하항, 영무성 하응도, 조계 류종지, 백곡 진극경 등을 데리고 남계藍溪(남계서원을 말함)에 갔었는데, 개암 강익, 역양 정유명(1539~1596), 매촌 정복현(1521~1591), 남계 임희무(1527~1577) 및 많은 선비들이 모여 강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정여창 선생에 대해 말씀하기를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조금의 흠도 없었는데, 그분이 화를 면치 못한 것은 천운이었다.’라고 했으며, 잇달아 갈천의 여막廬幕에 가서 갈천과 첨모당을 위로하였는데, 선생이 갈천 임훈에 대해 칭송하기를 ‘중성仲成의 덕과 재주는 도당都堂의 한자리에 앉아 부화한 풍속을 다스리기에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이때 갈천의 나이가 60을 넘었는데, 상喪에 거하는 것이 예법보다 훨씬 더 하였다. 선생이 편지를 보내 예제에 맞게 슬픔을 절제할 것을 권면하였으며, 이때 다시 찾아가 위문하였다. 어떤 사람이 ‘삼동의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구경할만하다.’라고 하자, 선생은 ‘이번 걸음은 오로지 주인을 위로하기 위해서니, 다른 날 그와 함께 유람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하였으니, 첨모당을 만난 것이 1566년 이전에 몇 차례 있었을 것으로 보여 1960년의 <덕천사우 연원록>에 와서는 종유인에서 문인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이상필, <전게서>)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필자의 종조부 말씀이 ‘선생 사업은 우찌 그리도 말이 많을꼬?’ 했었는데, 산림의 영수 남명 선생, 그 방대한 학파, 학맥, 그 회통의 학문, 그러니 여러 말이 많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오죽하면 평생의 지우知友 성대곡成大谷이 ‘그 논하는 것이 다름이 많으니, 백 세를 기다려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겠는가?
‘천령의 유종’이라 존경했던 일두 정여창 다음은 소고대小孤臺로 갔다. 고대 정경운(1556~?)이 노닐던 곳이다. 함양 읍내 뇌계에 있다. 고대의 조부 당곡 정희보(1488~1547)가 함양 모간촌으로 이거 했고, 부친 정율(?~1557)이 뇌계 유호인(1445~1494)의 손녀와 혼인하게 되면서 석복촌席卜村에 정착하게 되었다. 고대는 내암의 제자로, <고대일록>孤臺日錄으로 유명하다. 이 기록은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 발발 때부터 1609년(광해1) 10월까지 일기로 저자 일상을 기록하는 범주를 넘어서 조정 및 향촌의 동향, 남명학파 의병 활동 동향, 남명학파 정치 사회적 변화 동향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설석규, ‘정경운의 현실 인식과 <고대일록>’ <남명학>15집 참조) 후손이 뇌계 시내 가운데 있는 바위에 최근에 각자刻字한 것이 있어서 찾기가 쉬웠다.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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