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광해군·정조가 내린 ‘사제문’ 속 남명 위상

산청시대 2022-06-28 (화) 23:57 1년전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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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사제문비

◇선조의 사제문
1572년(선조5) 2월 8일 남명이 죽자 선조는 제문을 내려 애도하면서 심의겸(1535~1587)을 집전관으로, 김찬(1543~1599)을 예관으로 삼아 부의賦儀의 물품을 보내어 제를 올리게 했다. 그 제문의 내용을 통하여 남명을 향한 선조의 흠모와 평가를 알 수 있다.
‘… 하늘이 사문斯文을 버려 선비가 갈 길을 잃었으니, 참모습 버리고 시세에 아첨컨만, 뜻 더욱 굳게 하여 공公의 지조 변함없고, 문장 익힘은 여사餘事라 도道를 향해 매진했다. 나아갈 바 이에 있어 명성 싫어하더니, 보배를 품고서 연하煙霞에 깃들었다.… 자기의 생각을 발표할 때도 의기가 순정하고 말과 글에 위엄이 있었다. 누가 말하였던가, 봉황의 소리라고. 모든 사람의 입에서 재갈을 벗기니, 간신들의 뼈를 서늘하게 하였고, 뭇 벼슬아치들의 얼굴에 땀이 흐르게 하였다. 위엄은 종묘와 사직에 떨쳤고, 충성스런 분노는 조정을 격동시켰다.… 공이 오기만 하면 팔과 다리로 삼으려 하였는데,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리. 한 번 병들자 소미성少微星이 빛을 잃을 줄이야.… 누구를 의지하여 냇물을 건너며 어디에서 높은 덕을 보고 배울까. 소자小子는 어디에 의탁하며, 민생들은 누구에게 기대할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다.… 대로가 잇달아 세상을 뜨니, 온 나라가 텅 비어 본받을 데 없음을 어찌하랴. …’
김충열은 <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에서 ‘산골 처사에게 내린 국왕의 제문으로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겠다. 국왕 스스로가 제자의 예를 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명으로서는 사후 최고의 영예를 입었고 또한 사림의 긍지가 되살아났다.’고 하였다.

국왕 스스로가 제자의 예를 표한 선조의 사제문

◇광해군의 시호諡號와 사제문
광해군은 남명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문정공文貞公(도덕박문道德博文: 도와 덕을 겸비했고, 학문이 넓다는 뜻의 문文. 직도불요直道不撓 : 강직한 도리를 지켜 굽히지 않는다는 뜻의 정貞)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예조 좌랑 안경(1564~?)을 보내서 치제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 6년. 12월 15일>
‘… 생각건대 영령은, 하악河岳의 수기秀氣 안고 일성日星이 정광精光내려 엄격하고 순결하며 정대하고 강직하였다. 만길 절벽 우뚝하고 세속 멀리 벗어나, 덕은 사과(유학의 네 덕목 : 덕행, 언어, 정사政事, 문학)를 겸하였고 용기는 삼군三軍을 제압하였다.… 격언과 지론으로 전후 이어 봉장封章할 제, 백구白駒 이에 매어두어 단봉丹鳳 날지 않았다면, 손 뒤집는 사이에 요순시절 이루었으리. 임금 부름 헛된 수고 초야에서 불기하니, 함축한 양덕을 끝내 펴지 못하였다.…’

영의정 추증하고 문정공 시호 내린 광해군

◇영조의 남명에 대한 평가
영조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을 인견한 후 우의정 김치인(1716~1790)에게 말한다.
“지금 세상에 독서하는 선비 중 어찌하면 옛날 조식曺植과 같은 이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1년 1765.7.20.>

◇정조의 사제문
정조는 예관으로 1796년 예조정랑 민광로(1749~1813)를 보내 치제했다.
‘…용은 심연에 잠겨있고 봉황 천길 나르니, 세상 드문 영물은 높거나 깊이 있다. 하물며 (남명 같은) 인걸이야 어찌 자주 나타날까. 기산 허유許由 아득하고 상산 사호四皓 적막하다. 고절을 우러르니 유수 백운 아련한데, 다행히도 남명이 동국에 태어났다. 깨끗하고 당당하며 높고도 우뚝하여, 일성이 광채 뿜듯 상설霜雪이 고결하듯, 내 사책 열람하며 경의 평일 알아보니, 신명 통한 효우에다 세상 덮을 명절이라. … 원하는 바 이윤伊尹이니, 세상 어찌 잊었으랴, 한밤중 눈물 흘려. 만년에 한 번 나아와 큰 계책 펼치고는 돌아가 은둔하니 산천새 별장일세. 지리산 두류에서 옷 털고 갓끈 씻어, 영남 호남 벗 사귀니 지란 향기 소영韶? 풍류. 내 왕위에 임하여 옛 본받아 다스릴 제, 뉘 광란 막으며, 뉘 공경 맡으랴. 누가 병폐 고쳐주며 누가 우매함 고쳐줄까? 만약 경이 있었다면 손바닥 보듯 쉬웠으리. 소미성少微星 찬란하고 뇌룡사雷龍舍 우뚝하니, 청풍淸風 이에 늠름하여 나의 말 떳떳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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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목표는 임금 도와 천하태평을 만드는 것’

‘남명의 평소 언행을 담은 <언행총록>에서 그가 제갈량을 평하여, 왕왕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하고 있다. 남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윤伊尹과 같이 임금을 도와 천하를 태평하게 만드는 것이었기에 백성들을 걱정하여 눈물 흘린 일과 단 한 번 임금을 만나 스스로의 뜻을 개진하고 영영 지리산에 은거한 까닭에, 그 당시에 남명과 같은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하다는 뜻을 담았다.’(<사제문 세 편에 나타난 남명의 특징> 김경수 2014)

실천궁행에 충실했던 탁영과 삼족당 후손 김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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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교수는 산청읍 정곡이 고향이고 탁영 김일손(1464~1498)의 후손이다. 김일손은 남명도 여러 곳에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1454~1504) 등과 함께 선현으로서의 깍듯한 예모를 보인 인물이다. 실제 탁영이 유학사에 남긴 족적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삼족당 김대유는 바로 그런 탁영의 조카였다. 삼족당은 실천궁행에 충실했던 학자였다. 김영기 교수는 바로 이런 분들의 후손이다. 교직을 물러나 편히 쉴 연세인데도 그는 ‘남명사랑’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분의 ‘남명사랑’에 격려를 보낸다.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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