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0) ‘남명 사랑’ 김영기 상임대표 저서에 나타난 ‘남명’

산청시대 2022-06-29 (수) 00:07 1년전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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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창의문도

김영기金渶琪라는 분이 있다. 행정학 박사로 국립경상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경남 지역사회 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이다. 그는 최근 ‘남명 사랑’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회원 1천명 확보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그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거의 달성해가고 있으며, 경남도로부터 법인 승인을 받았다. 김 교수는 현재 ‘남명 사랑’ 상임대표다. 이분의 호는 수중守中인데 중을 지킨다는 뜻일 게다. 아마도 독자 여러분은 이 노학자가 노년을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웬만한 일은 거의 사비로 처리한다.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다.

2019년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사상과 실천> 발간

김 교수는 퇴직하고 본격적으로 ‘남명 공부’를 해서 저서를 연달아 2권을 내었다. 2019년 ‘남명사랑’을 발기하면서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사상과 실천>을, 2021년 <남명 조식과의 대화>를 발간했다. 미국의 여러 대학교의 객원교수를 지내면서 18권의 저술을 했고 4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여러 기관 단체의 자문위원을 맡아왔던 행정학자가 일거에 남명학자, 남명 운동가가 된 것이다.
김영기 교수는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사상과 실천> 책머리에서 ‘저자가 남명 선생과 인연을 짓는 데 70년이 걸렸다. 어릴 적 나의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천자문을 읽을 때, 아둔한 손자의 기억 속에 새겨주신 남명 선생을 이제야 공부하기 때문이다.’라고 술회했다. 사실 고전의 전수傳受는 ‘밥상머리 교육’에서 연면히 이어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한 학파의 형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밥상머리에서부터 혹은 관혼상제의 일상 예절을 통해서 학파적 전통은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과의 대화>에서 ‘남명은 조선의 봉황’

그는 두 번째 저서 <남명 조식과의 대화>에서 ‘남명은 조선의 봉황이었다’라는 장章을 설정해 제1절 ‘군왕과 사관의 평가’에서 여러 학자가 연구한 바를 적시했고, 제2절 ‘학자들의 평가:남명에 부여한 호칭’에서 ▲1946년 이만규가 <조선교육사>에서 ‘조선 최고의 교육자’로 평가했다. ▲이동환의 <남명 사상의 재조명>에서 ‘선비정신의 표상’이라고 했다. ▲권인호는 <남명 조식의 현실 인식과 출처 사상 연구>에서 ‘출처의 대본’이라 평했다. ▲최석기는 <송원 시대 학맥과 학자들>에서 ‘…자기 실천 또는 몸으로의 실천을 만년까지 꼿꼿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행하여 세상에 유례가 없으며, 그러한 자기 실천을 사회로 확대시키는 제가齊家 치국治國 펑천하平天下의 추행推行에서도 조선에 유례가 없다.’ 하였고, ▲박흥식은 <남명 사상이 후대에 끼친 영향>에서 ‘남명은 철학 사상에서의 자유 정신, 사회사상에서의 실천정신, 정치사상에서의 민중 정신, 교육사상에서의 실용 정신을 그의 삶에서 이루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박흥식은 남명은 ‘당대의 유자儒子들에게도 사표師表가 되었다.’고 하였다.

“장자는 굽힐 수 없다”며 봉황처럼 떠난 남명

‘군왕과 사관의 평가’에서 남명을 봉황이라 한 평가를 보면
‘남명은 한세상을 숨어서 살았는데, 영남지방에 은거하여 벼슬 보기를 진흙과 같이 여겼다. 그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 일찍이 탕춘대 북쪽, 무계동 시냇가에 노닐게 되었다. 여성위礪城尉 송인(1517~1584)은 관은 비록 부마駙馬였으나 자못 유학의 의리가 있는 것으로 자처하였는데, 남명의 풍모를 흠모하여 산 계곡에서 술 한잔을 하고 싶어 창의문 솔숲 사이에 장막을 쳐두고 길옆에서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서서 남명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남명이 지나가자 하인을 시켜 맞이하게 하였는데, 남명은 그가 귀한 신분에 있는 줄을 알고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취한 척 떠나면서 말했다.
“장자長子는 굽힐 수가 없는 것이다.” 여성위가 머리를 들어 남명이 가는 것을 바라보니 아득할 뿐이었는데, 천 길의 기상을 지닌 봉황과 같다고 생각했다.’

봉황鳳凰은 신화 및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 앞에 봉황을 탄 피리 부는 신선이 있다. 삼족오 뒤에 용이 있으며, 고구려 고분 벽화에 따르면 봉황은 개벽의 상징이다. 봉은 수컷, 황은 암컷인데 성군聖君이 출현하거나 세상이 태평성대일 때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위키백과>


‘영남지방 은거하며 벼슬을 진흙과 같이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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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선생 초상화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이야기다. 남명은 당대를 부조리한 시대로 판단했다. 이 때문에 엄격한 출처관에 입각하여 처사의 길로 일관하였다. 서두에서 남명이 ‘한 세상을 숨어서 살았는데 영남지방에서 은거하여 벼슬 보기를 진흙과 같이 여겼다.’고 한 것은 남명의 전체적인 풍모를 나타낸 것이다. 또한 마지막 구절에서는 여성위 송인의 생각을 들어 천길 나는 봉황의 기상이라 하여 서두에서 제시한 남명의 풍모와 대응시켰다. … 한강寒岡 정구(1543~1620)가 남명의 제문에서 ‘태산 같은 우뚝한 기상이 있고, 높이 나는 봉황의 정취가 있다.’고 스승 남명을 표현한 것은 그 좋은 방증이 된다. (정우락 <남명과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졸기와 사관의 평 인용

김영기 ‘남명은 조선의 봉황이었다’ 장을 보면,
이덕일의 <조선이 버린 천재들>에서 ‘남명 조식은 조선이 버린 천재이며 역사의 선각자이다.’라는 말과, 한형조의 <남명, 칼을 찬 유학자>에서 ‘퇴계와 더불어 남명이 있는 줄 몰랐다.’라는 말을 들며 이 장을 시작한다. 그리고는 김경수의 <사제문 3편에 나타난 남명의 특징>에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한 경우에도 내리지 않는 <사제문>을 남명 사후에 바로 내린 것…’으로 ‘…그 인물의 학덕과 행실 등을 표창하여 후세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에 그 글의 한 구절 한 글자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김 교수는 선조, 광해군, 정조의 사제문을 김충열, 최석기, 김경수의 글에서 인용하여 기술하고,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졸기卒記와 사관들의 평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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