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1) 산청의 근세 학자들
산청은 부화富華한 도읍이 아니다. 산중 벽지 궁벽한 곳이다. 그러나 명현이 이곳에 와서 찬란한 문화가 피어났다. 우리는 이점을 기억하고 긍지 삼아야 할 것이다. 이 땅 위에 많은 사람이 살다 갔다. 그 사람들의 살았던 흔적 모습을 문화라 부른다. 그 사람들이 지혜를 쌓은 것을 학문이라 할 것이다.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혹은 극복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그 속에서 민초들의 삶의 모습은 유추하기도 쉽지 않다. 지배계급, 지식인의 통치양식과 사고 방법이 대개 문화로 남아서 전승되고 있다. 그 편린이라도 찾아보자. 고속도로 공사장서 구석기 시대 유물 산청지역에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 흔적이 없으면 그 자취를 알 수 없다. 종래에 경호강을 따라 그 강변에 신석기 또는 청동기 이후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1993.1.29.~4.21, 신라대학교, <산청군 문화유적 정밀 지표조사 보고서> 1994년 발행). 조선시대 영조 43년 ‘산청현’ 등장 삼한시대는 ‘고순시국’古淳是國(오주환, <산청 향토사>)에 비정 되었고 가야시대는 걸찬국乞?國, 562년에 신라에 복속되고 나서 지품천현(산청), 궐지군(단성현), 적촌현(단계현) 등으로 지방행정 단위의 이름이 붙더니, 고려말(1390년)에 산음현, 강성현으로 병합되고 감무監務가 파견되는 행정 단위가 되었다. 조선시대 영조 43년(1767년)에야 산청현이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삼장 시천과 단성 일부는 1906년까지 계속 진주에 속해 있었다. 1) 문화의 여명黎明 목면 종자 전래한 삼우당 문익점 선생 삼우당의 공은 목면 종자를 전래하여 산업혁명을 이룬 공로뿐만 아니다. 그는 고려의 수절신이었고 성리학자였으며 효자였다. 삼우당이 산청의 문화를 깨워 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틀림없다. 2) 조선 실천성리학 꽃피다. 산음현 최초의 대과 급제자 덕계 오건 산청에는 조선 초에 이름난 정자 ‘환아정’이 건립되었다. ‘환아정’은 ‘거위와 바꾸다’라는 뜻 아닌가? “왕희지가 도사道士에게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거위와 바꾸었다”는 옛날이야기다. 그런데 하필 왜 산청 땅에 이런 유적이 남아 있을까? ‘산음현’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 것은 신라 경덕왕(757) 때다. 그때 왕희지의 고사를 알아서 산음현이라 했을까? 아닐 것이다. 산이 깊고 숲이 무성하다고 ‘산음’山陰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조선 초기에 와서 독서량이 풍부한 선비들이 중국의 고사에 빗대어 멋진 스토리텔링을 붙였을 것이다. 환아정은 조선 초에 건립되어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오다가 1950년 3월 10일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올해 복원 되었다. 참으로 성대한 일이라 하겠다. 경호강鏡湖江, 회계산會稽山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지명과 같다. 그때 있었던 건물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수계정修契亭은 왕희지가 선비들과 시회, 곧 난정계蘭亭契를 열었던 곳이란 뜻이고, 환아정은 현감 심인沈潾이 창건하고 권반權攀이 이름을 지었다. 사경각寫經閣과 응향각凝香閣이 결합된 ‘ㅏ자’형의 13영楹 건물이었다 한다. 그 외에 도사관道士館, 세연지洗硯池, 세연정洗硯亭, 소쇄정瀟灑亭, 흥학당興學堂 등의 건물이 있었다. 역대 현감들이 허물어지면 보수하고 무너지면 재건하여 그때마다 기문을 남겼다. 심인이 창건한 환아정‥‘기문’ 남겨 <산청군 읍지>에 남아 있는 ‘중수기문’을 보면, 송정 하수일(1553~1612), 내암 정인홍(1536~1623), 우암 송시열(1607~1689), 백헌 이경석(1595~1671, 그의 아버지 이유간이 산음현감, 영의정), 이해운(94대 현감, 증조부 이관하 현감), 이면제(이경석 후손), 이정규(129대 현감), 이만시(퇴계 후손, 142대 현감) 등이다. 환아정 편액은 석봉 한호(1543~1605)가 썼는데, 임란 때 없어져 버린 것을 겸재 하홍도(1593~1666)가 찾아서 다시 걸었다. <산청군지>의 환아정 조에 의하면 덕계 오건의 원운에 차운한 시 47수가 실려 있고, 그 외 ‘박은조’가 수집한 시가 36수에 이른다. 오건의 원운시 2수 중 한 수를 본다. 경호주인鏡湖主人 덕계의 좋은 원운에 따라 역대 산음 현감은 물론, 수많은 명류 들이 경호강, 환아정, 지곡사, 수계정 등등 산청 명소를 주제로 한 차운시를 지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는 침체기로 16세기 이후에 퇴계학파와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남명학파는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기축년 3년 뒤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당하여 남명학파는 대거 의병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선조 말 광해 조 시기에 정계 학계를 주도하게 된다. 다시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북인은 소멸되고 말았다. 남명학파는 한강 정구를 매개로 하여 대거 남인화 되고 일부는 노론화 되는 비운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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