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1) 산청의 근세 학자들

산청시대 2022-07-25 (월) 23:18 2개월전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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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의 이동서당

산청은 부화富華한 도읍이 아니다. 산중 벽지 궁벽한 곳이다. 그러나 명현이 이곳에 와서 찬란한 문화가 피어났다. 우리는 이점을 기억하고 긍지 삼아야 할 것이다. 이 땅 위에 많은 사람이 살다 갔다. 그 사람들의 살았던 흔적 모습을 문화라 부른다. 그 사람들이 지혜를 쌓은 것을 학문이라 할 것이다.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혹은 극복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그 속에서 민초들의 삶의 모습은 유추하기도 쉽지 않다. 지배계급, 지식인의 통치양식과 사고 방법이 대개 문화로 남아서 전승되고 있다. 그 편린이라도 찾아보자.

고속도로 공사장서 구석기 시대 유물

산청지역에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 흔적이 없으면 그 자취를 알 수 없다. 종래에 경호강을 따라 그 강변에 신석기 또는 청동기 이후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1993.1.29.~4.21, 신라대학교, <산청군 문화유적 정밀 지표조사 보고서> 1994년 발행).
마침내 1996~97년, ‘대전 통영 고속도로’ 공사 기간 기원전 1만2천년 전의 흔적이 나타났다. 전답으로 사용되는 퇴적층에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쏟아진 것이다. 산청읍 정광들 경작토 2.5~3m 아래에서 ‘격지돌’이 10여 곳 무더기로 발견되었고, 석영石英으로 만든 ‘찍개’, ‘밀개’ ‘톱니날’ 등과 ‘발화석’發火石이었다. 또 이때 단성면 사월리 나들목 공사장에서, 청동기 시대 유적인 ‘환호유적’環濠遺蹟이 발굴되었고, 금서면 평촌리 농공단지 공사 시 환호유적이 발굴되어, 그대로 떼어내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져갔다는 말을 필자는 진주박물관 학술 보고 때에 들은 적이 있다. 이처럼 산청지역에도 오래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점차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 영조 43년 ‘산청현’ 등장

삼한시대는 ‘고순시국’古淳是國(오주환, <산청 향토사>)에 비정 되었고 가야시대는 걸찬국乞?國, 562년에 신라에 복속되고 나서 지품천현(산청), 궐지군(단성현), 적촌현(단계현) 등으로 지방행정 단위의 이름이 붙더니, 고려말(1390년)에 산음현, 강성현으로 병합되고 감무監務가 파견되는 행정 단위가 되었다. 조선시대 영조 43년(1767년)에야 산청현이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삼장 시천과 단성 일부는 1906년까지 계속 진주에 속해 있었다.

1) 문화의 여명黎明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 ‘지리산은 부산富山이라 풍흉이 없다.’라 하였다. 산청은 깊은 산중에 있는 고을이라 별로 세상의 이목을 받지 못하였다. 고려말에 와서 우리 고을은 빛나는 각광을 받으며 역사에 출현하게 된다. 필자는 이 일을 문화의 여명이라 한다.
고려말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고려 충혜왕1 1331~조선 정종2 1400)선생이 단성 배양에서 태어난 것이다. 136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13년(1363년) 사간원 좌정언이 되었다. 삼우당은 이해 4월에 홍순(洪順, ?~?), 이림(李琳, ?~1391) 등을 수행하여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사행使行했다. 그해 11월 원나라 순제와 기황후奇皇后가 공민왕을 축출하고 덕흥군을 고려왕에 추대하려 하자 이에 반대, 먼 남황南荒의 교지국交趾國으로 귀양을 간다. 귀양이 풀려 돌아오는 길에 면화 종자를 구해서 1367년 1월에 귀국, 곧바로 귀향하여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종자를 심었다. 종자는 온 나라에 퍼졌고, 그 공을 찬양하여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받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진다. 다시 세종 원년(1440) 영의정에 추증되고 부민후富民侯에 봉해졌다.

목면 종자 전래한 삼우당 문익점 선생 

삼우당의 공은 목면 종자를 전래하여 산업혁명을 이룬 공로뿐만 아니다. 그는 고려의 수절신이었고 성리학자였으며 효자였다. 삼우당이 산청의 문화를 깨워 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틀림없다.
또한 고려가 망할 때, 지리산 배록동排祿洞으로 18현이 은둔하였다 한다.(<농은공 실기> 대포서원) 이것은 고려의 지식인이 대거 지리산으로 남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가 생초의 대포마을에 은둔한 것은 사실이고 그 후손들이 번성하고 있다. 그는 공민왕 9년(1360)에 별시에 급제하여 예의판서에 이르렀다. 공양왕 4년(1392) 7월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부조현不朝峴에서 수절하다가 먼 지리산으로 은둔하였고 자손들에게도 ‘부운계’浮雲契를 주어 벼슬하지 못하게 하였다.
지식인들은 정치 사회적 변혁이 있을 때 이동을 한다. 조선조에도 계유정란癸酉靖亂(1453) 같은 정변 때 지식인들이 대거 이동하고 문화도 전파되는 것을 우리는 본다. 삼우당이 태어나고 고려 지식인들이 남하함으로써 산청이 문명화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2) 조선 실천성리학 꽃피다.
산청지방에 학문의 꽃이 활짝 핀 것은 남명선생이 덕산동으로 들어오게 되면서부터이다. 사륜동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덕산으로 들어왔으니 그야말로 학문의 꽃이 이곳에서 만개하였다. 이로써 ‘강우학파’가 형성되었고 미증유의 대 전란인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3)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과 환아정換?亭
덕계 오건은 산음현 최초의 대과 급제자이다. 11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5세에 계조모상을 당하기까지 다섯 분을 장사 지내고 모두 시묘살이를 하면서 청년기를 거의 보냈다. 36세에 급제하여 성주향교 교유敎諭로 나가 성주 목사 금계 황준량과 사귐으로 퇴계를 만나게 되고, 한강 정구(1543~1620)를 제자로 맞게 된다. 31세에 남명선생을 찾아 수학했고, 삼장사, 지곡사에서 선생을 모시고 여러 차례 강회를 열었다. 벼슬길에 나가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뜻과 맞지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왔다. (‘선생이 오시니 봄이 온 것 같아’ 편 참조)

산음현 최초의 대과 급제자 덕계 오건

산청에는 조선 초에 이름난 정자 ‘환아정’이 건립되었다. ‘환아정’은 ‘거위와 바꾸다’라는 뜻 아닌가? “왕희지가 도사道士에게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거위와 바꾸었다”는 옛날이야기다. 그런데 하필 왜 산청 땅에 이런 유적이 남아 있을까? ‘산음현’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 것은 신라 경덕왕(757) 때다. 그때 왕희지의 고사를 알아서 산음현이라 했을까? 아닐 것이다. 산이 깊고 숲이 무성하다고 ‘산음’山陰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조선 초기에 와서 독서량이 풍부한 선비들이 중국의 고사에 빗대어 멋진 스토리텔링을 붙였을 것이다. 환아정은 조선 초에 건립되어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오다가 1950년 3월 10일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올해 복원 되었다. 참으로 성대한 일이라 하겠다.

경호강鏡湖江, 회계산會稽山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지명과 같다. 그때 있었던 건물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수계정修契亭은 왕희지가 선비들과 시회, 곧 난정계蘭亭契를 열었던 곳이란 뜻이고, 환아정은 현감 심인沈潾이 창건하고 권반權攀이 이름을 지었다. 사경각寫經閣과 응향각凝香閣이 결합된 ‘ㅏ자’형의 13영楹 건물이었다 한다. 그 외에 도사관道士館, 세연지洗硯池, 세연정洗硯亭, 소쇄정瀟灑亭, 흥학당興學堂 등의 건물이 있었다. 역대 현감들이 허물어지면 보수하고 무너지면 재건하여 그때마다 기문을 남겼다. 

심인이 창건한 환아정‥‘기문’ 남겨

<산청군 읍지>에 남아 있는 ‘중수기문’을 보면, 송정 하수일(1553~1612), 내암 정인홍(1536~1623), 우암 송시열(1607~1689), 백헌 이경석(1595~1671, 그의 아버지 이유간이 산음현감, 영의정), 이해운(94대 현감, 증조부 이관하 현감), 이면제(이경석 후손), 이정규(129대 현감), 이만시(퇴계 후손, 142대 현감) 등이다. 환아정 편액은 석봉 한호(1543~1605)가 썼는데, 임란 때 없어져 버린 것을 겸재 하홍도(1593~1666)가 찾아서 다시 걸었다.

<산청군지>의 환아정 조에 의하면 덕계 오건의 원운에 차운한 시 47수가 실려 있고, 그 외 ‘박은조’가 수집한 시가 36수에 이른다. 오건의 원운시 2수 중 한 수를 본다.

경호주인鏡湖主人
花落春將盡 江淸月復明(화락춘장진 강청월복명)
꽃지고 봄은 저무는데, 강물은 맑고 달은 더욱 밝네.
孤舟一樽酒 相契百年情(고주일준주 상계백년정)
외로운 배 한 동이 술로, 마주 앉아 백년의 정을 나눈다.

덕계의 좋은 원운에 따라 역대 산음 현감은 물론, 수많은 명류 들이 경호강, 환아정, 지곡사, 수계정 등등 산청 명소를 주제로 한 차운시를 지었다.
환아정에 관계되는 마음을 울리는 사건과 기록들이 있지만, 특히 1795년 산음 현감 이면제의 중수기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가슴을 울린다.
‘정자가 허물어지면 이름도 따라 없어지고, 이름이 없어지면 고을도 없어질 것인데 그래도 되겠는가?’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는 침체기로

16세기 이후에 퇴계학파와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남명학파는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기축년 3년 뒤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당하여 남명학파는 대거 의병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선조 말 광해 조 시기에 정계 학계를 주도하게 된다. 다시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북인은 소멸되고 말았다. 남명학파는 한강 정구를 매개로 하여 대거 남인화 되고 일부는 노론화 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 이후 남명학파는 침체의 길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1728년에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나게 되는데 동계 정온(1569~1641)의 후손 정희량(?~1728)과 내암 정인홍의 제자 도촌 조응인(1556~1624)의 후손 조성좌(?~1728)가 주동이 됨으로써 강우 지역은 정거停擧(과거를 못보게 함) 조치가 되는 등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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