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유풍 낙선호의·사생취의 전통 이은 산청인

산청시대 2022-08-19 (금) 10:22 1년전 886  

1882년 2월 4일 향민대회를 소집한 다음 향민들이 비폭력적으로 관가로 몰려갔다. 김령이 앞장서서, 달아나다 잡혀 온 현감과 관속들을 향해, 환폐의 시정을 요구하며 그들의 비행을 매도하였다. 이처럼 수령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본 관속들은 향민을 몰아내었다.
앙심을 품고 있던 관속들은 밤이 되자, 객사에 들어와서 모여 있던 향민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가하였다. 돌, 몽둥이 등으로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하였다. 김령을 비롯한 20여 명이 쓰러졌다.
이에 분개한 향민들은 관속들을 축출하고 29일 향원 회의를 열어 좌수, 이방, 호방 등 관속들을 선출하여 행정을 담당케 했다. 이로부터 5월8일까지 100일(98일)간의 향민 자치를 하였다.

김인섭은 이 사건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향민대회를 열어 객사에서 호곡하고 있는데, 밤 이경에 난이 일어났다. 우리 부자는 다 같이 흉봉에 얻어맞았다. 생사를 모르는 대소인이 20여 명이나 되었다.’ (오주환, ‘산청 향토사’ ‘단계 일기’)
‘마침내 2월 4일 밤 난이 일어났다. 향민 40여 명이 모두 흉봉에 맞아 사경에 이르렀다. 대인(김령)은 그때 여러 사람과 향사당鄕射堂(향사례를 베푸는 집)에 있다가 변을 당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병묵의 잔당이 포위하여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치니, 그 참상은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한다. 우리 부자는 4, 5개월을 다쳐 누어서 인사불성이 되었다.’ (김인섭, ‘임자도남천행록荏子島南遷行錄’)

그러나 어사 이인명(1819~?)이 국왕에게 보고한 별단別單(임금에게 보고하는 본 내용의 문서에 참조할 수 있도록 첨부한 문서)에 의하면 ‘김인섭 부자가 향민과 작당하여 난을 일으켰다. 현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현감은 도망쳤다. 향민이 이방과 창고 담당 아전의 집에 불을 지르고, 객사로 들어가 호곡하였다. 현감은 두 차례나 길에서 잡혀 구타를 당하였다. 무기를 지니지는 않았으나, 난을 일으켰으니, 백주의 도적이다.’하는 내용이었다.

양측의 사료를 종합하여보면 민란 발발의 모습은 이러하다.
‘달아나던 현감을 잡아놓은 향민들은 통문을 돌려 2월 4일 향민대회를 열었다. 김령 지휘하에 관가로 몰려갔다. 현감에게 이무미의 반환, 환폐의 시정 등을 요구하면서 과격한 언사로 그들을 매도했다. 관장의 수모를 보고 있던 관속들이 향민들을 강제로 몰아내었다. 그러나 향민들이 민란이라 할 정도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근거는 없다. 아전의 집을 헐고 방화했다고는 하나 믿을 수는 없다. 그대로 헤어질 수 없었던 주동급 향민들은 객사에 모여 통곡했고, 김령 등 나이 많은 지도자들은 향사당에 있었다. 복수심에 흥분한 관속들이 밤에 향민들을 폭력으로 공격했다.’ 대체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2월 4일의 ‘단성민란’은 관속들의 폭력에 의해 발단이 된 것이다.
‘향민 자치’는 김령의 지휘하에 향원회를 중심으로 실시되었는데, 김령은 부상을 당하여 단성 읍에서 5월 초까지 누워있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향원회는 자치행정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과세권을 행사하였다. 대동계 장부에 따라 매 결당 1량씩 도합 1,200량을 징수하였다. 일부 비용은 부자들이 물었다고 하니 향민들의 협조가 잘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향민 자치는 신임 현감 이원정이 부임한 2월 22일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선무사 이삼현이 들어와 향민들과 대토론회를 벌여 5월 8일 이후에 중단되었다. 정부 측 사료는 ‘임술록’에 대부분 수록되어 있는데, 임술록은 편자가 미상이나, 경상도 선무사로 활약한 이상현의 문집 ‘종산집’鍾山集에도 수록되어 있다고 오주환은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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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령 영구불망비

3) 민란의 결과와 정부의 대책
단성민란을 효시로 하여 2월 18일 진주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이어서 거창, 함양 등과 전국 각지의 농민항쟁이 시작되었다. 2월 22일 조정은 감사에 이돈영, 단성 현감에 이원정을 임명하고, 2월 29일 박규수(1807~1877)를 진주 안핵사로 파견하였다.
단성 향민들은 2월 18일 상경하여, 비변사에 환폐의 시정을 진정하여, 탕감을 약속받았다. 다시 신임 감사 이돈영에게 3월 5일 단성 사태에 대한 등장을 올렸다. 이에 감사는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 있으며 신임 현감이 도래하는 대로 주동자를 엄히 다스리겠다.”는 답을 받았다. (‘산청 향토사’, 이돈영, ‘저김정언서抵金正言書’)

김인섭은 안핵사 박규수에게도 단자를 보냈다.
‘횡령을 마음대로 한 간악한 자와 반란을 일으킨 흉도들은 형장 한 대 맞지 않고 마음대로 다니고 있습니다. 환곡의 적폐를 근절시키기 위해선 주범 6.7명은 반드시 목을 베어야 할 것입니다.’ (‘산청 향토사’, ‘임술록’)

그러나 박규수는 간악한 서리보다 지방의 완악한 토호들을 더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김령 부자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김령을 체포하지는 못했으나, 향원 수명을 진주에 투옥하였다.
결국 김령은 6월 12일 어사 이인명에 의해, 김인섭은 7월 4일 이삼현의 청죄에 의해 체포되었다. 김인섭은 의금부에서 곤장 30대를 맞고 풀려났고, 김령은 전라도 임자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8월에 귀향하였다.
이 두 사람 외에 체포된 향민은 12명인데 모두 진주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령은 1864년 7월에 별세하였고, 김인섭은 재기용되어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민란 이후 새로 부임한 현감의 모함을 받기도 하였지만, 당시 재상 정원용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다. 1867년에는 어사 박선수(1821~1899)에 의해 무단토호武斷土豪로 지목되어 강원도 고성 통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8월 귀향하였다. 1893년에는 영남의 여러 선비와 산천재에서 <남명집>을 교정했다. 다시 1894년에는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고, 1903년에 세상을 떠났다.

4)결론
단성민란은 비폭력 향민 저항이었다. 지도자들의 처벌 등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는 하였지만 ‘100일간의 향민 자치’를 실현하는 민주 역량을 보이는 등 민본사상의 실현을 보이기도 했다.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향민 저항의 목적이었던 환곡은 1만 석을 남겨두고 탕감을 받음으로써 투쟁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하게 된다.
1811년 홍경래 난이 일어난 후부터 조정에서는 삼정을 개혁하려 했지만 큰 효과는 얻지 못했다. 폐단은 이어져 마침내 1862년 5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때 영중추부사 정원용(1783~1873)이 총재관에 임명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1863년부터 수년간 덕천서원 원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1860년에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했고, 1894년 갑오 동학운동이 일어났다. 1860년 청일전쟁, 1896년 병인양요, 1904년 노일전쟁. 기울어가는 국운은 만회할 수 없었다. 결국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의 삼정의 문란은 국운 쇠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산청인은 역사의 구비 마다 남명의 유풍인 낙선호의樂善好義,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면면한 전통을 이어왔던 것이다. (성호 이익, ‘경상우도인이 낙선호의 하는 것은 남명의 유풍이다.’)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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