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2) 단성민란은 전국 농민 봉기 도화선이 되었다

산청시대 2022-08-19 (금) 10:26 3개월전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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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향교

1) 사건의 발단
‘단성민란’ 또는 ‘단성 농민항쟁’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1862년 2월 4일에 발발하였다. 그러나 그 원인은 1858년 단성현감 임기상이 1만8천 양兩을 수탈하여 대부분 착복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체직 기일이 1개월이 넘도록 떠나지도 않고 수탈을 계속하였다. 그다음으로 부임한 임병묵(철종 2년, 1861년)은 그해 12월 이무미移貿米(다른 고을에서 값싸게 사거나 대여한 곡식) 3천석 분을 횡령했는데, 이로 인해 수탈이 심해지자, 김인섭(1827~1903) 부자를 비롯한 향민들이 감사에게 진정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그 시정을 노력했다. 마침내 향민들이 현감에게 가서 따졌지만, 오히려 관의 위세로 김인섭 부자와 향민들을 습격,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했다. 이에 분개한 향민들이 관원을 몰아내고, 100일 동안 향민 자치를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해 2월 18일 일어난 진주민란의 단초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오주환, ‘산청 향토사’)
 
일찍이 남명 선생은 선조 원년 임금께 올린 <무진봉사>(1858)에서 ‘예로부터 권신이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자도 있었고, 외척으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자도 있으며, 부인이나 환관으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서리胥吏가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적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간곡한 ‘서리 망국론’을 상소한 뒤로도 이와 같은 폐단은 고쳐지지 않고 계속 심해 갔던 것이다.<남명집, ‘무진봉사’>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이수광(1563~1628)은 ‘조 남명이 말하기를 ‘조선은 서리 때문에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통렬하고 절실한 말이라 하겠다. 오늘날에는 서리의 폐해가 더욱 심하다.’라고 하였다.(최석기, ‘조선왕조실록 등에 보이는 남명 조식’)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강진에 귀양 가 있으면서 애절한 소식을 듣는다. 갈밭마을에 사는 한 젊은 여자가 남편이 자른 양물陽物을 손에 들고 관가에 호소하러 갔다가 문지기한테 쫓겨났다는 것이다.

애절양哀絶陽(1803 계해) 양물을 자른 것을 슬퍼하노라.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출정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 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사내가 양물 잘랐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네.
舅喪已縞兒未?(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아직 안 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이 집 삼 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려 있네.
薄言往?虎守?(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하소연 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里正咆哮牛去早(리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네. … 하략
(이덕일, ‘정다산과 그의 형제들’)

조선 후기 민생의 곤궁함과 관의 폐단이 이 시에 담겨 있다. 시아버지는 삼년상이 지났고, 갓 난 사내아이는 낳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이 집엔 장정 한 사람뿐인데 세 사람을 부당하게 군보軍保(병역을 면제하는 대신으로 베를 받는 제도)를 받으니 가장은 억울해서 양물을 낫으로 잘랐다. 이 광경을 본 아낙이 잘린 양물을 치켜들고 관가로 달려갔으나 문지기한테 쫓겨났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산이 시를 지은 것이다.
참다못한 민중들이 마침내 경상도 단성 땅에서 들고 일어났다. 이른바 ‘임술 단성민란’ 또는 ‘단성농민항쟁’이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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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선생일기

2) 민란의 전개
16세기 말 이곳 산청(현 시천면 사리) 땅에 살았던 남명 선생은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배다. 백성은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엎기도 한다.’라고 했다. (조식, ‘남명집, 민암부’)
1820년대 말에 단성의 환곡은 3만 석이나 되고 그 폐단이 심각하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850년대에는 환곡이 10만 석(쌀 6만 석)이나 되었다. 이에 감사 신석우(1805~1865, 재임 1855.11~1857.6)가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6만 석 중 2만 석은 감영에서 부담하고, 이웃 고을에서 1만 석씩 이송, 2만 석은 6~7년에 걸쳐 갚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가 경질됨에 따라 해결을 못 보고 말았다. (오주환, ‘산청 향토사’)

당시 단성 현의 단계 마을에 김영(호 해기海寄 1805~1864), 김인섭(호 단계端磎 1827~1903) 부자가 살았는데 김인섭은 정재 유치명(1777~1861), 성재 허전(1797~1886)에게서 배운 상산 김씨 가문의 선비였다. 17세에 진사시에 합격, 20세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남명을 사숙하여 늘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려 하였으나, 부모 봉양을 위하여 벼슬길에 나갔지만 오래가지 못하였다. 1864년에 해기공이 단성 현감의 모함을 입자 서울의 정원용(1783~1873)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덕천서원 원임록>에 의하면 정원용은 1863년부터 덕천서원 원장을 지냈으므로 단계 부자와 친면이 있었을 것이다. 영상을 지냈다.)

김인섭은 남명의 실천 성리학을 몸소 실천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감사에게 진정(단자單子, 등장等狀)하여 현감의 비정을 호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1861년 전 정언 김인섭이 감사 김세균(1812~1879)에게 올린 단자에는 ‘지난해 현감 임기상은 1만8,000량을 거두어 대부분을 사용한 다음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체임 1개월이 넘었는데도 떠나지 않고 수탈을 계속하고 있다. 단성의 경지 총결은 2.690결인데, 면세분을 공제하면 1.650결이다. 1,310결에만 과세하고 340결분은 횡령하였다.’라고 하였다.

1861년 12월 현감 임병묵(임기상의 후임)이 이무미 3천석 분을 횡령한 사건이 발각되었다. 그해 12월 26일 김령 부자와 향민 사족들은 횡령 사실을 감사에게 고발하였다. 임병묵은 3차례에 걸쳐 매 결당 4량 정도의 감세 조처를 한 것을 보면, 감사가 현감에게 변상 조처를 내린듯하다. 그러나 현감은 횡령액을 보충하기 위하여 1만2.900량(석당 4량 3전×3.000석)을 할당하여 1개월 이내에 징수코자 하였다.
이에 1862(임술)년 1월 초부터 몇 번의 향민대회가 열렸다. 1월 9일에는 대소민 500여 명이 모여 김영을 향민 대표로 선출하고, 6~7명의 향사 들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직접 가서 감사에게 등장等狀을 올리도록 결의하였다. (오주환, ‘산청 향토사’)

이로 보아 향민들은 비폭력 저항 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1월 26일 향원회의를 열어 적극적인 대관 투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현감 임병묵은 사태 수습은커녕 도망을 감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1월 26일 1차 도주 시는 현 생비량면 도전에서 붙들려왔고, 닷새 뒤인 21일 2차 도주 때는 비진飛津(비나루, 비느리, 현 신안면)에서 잡혀 김인섭 등의 설득으로 읍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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