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이 같은 바엔 차라리 ‘의’에 죽을 것이다’

산청시대 2022-08-31 (수) 00:45 2개월전 373  

‘소남召南은 대소헌 조종도 선생의 세장지로서 지금도 ‘조씨 고가’가 남아있다. 대소헌 선생은 1597년 황석산성에서 전사하기 이전에 함안 원북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갑오 1594)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대략 45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1530년에 하구정 조응경 공이 이곳에 먼저 터를 잡아 거주하였다는 기록도 있어 2016년 현재 대략 486년 전이 된다. 함안조씨 대소헌공파는 소남마을의 대성으로 거주하고 있다.’ (<소남마을지> 2017)
 
국도 20호선의 ‘살고개’에서 소남으로 가면 경호강 강가의 산록에 ‘송객정 유허비’送客亭遺墟碑가 있다. 송객정은 없어졌지만, 하구정(감찰공監察公 조응경)이 손님을 전송하고 함께 담론하던 곳이며, 대소헌도 이 정자에서 현인 호걸들과 학문과 세정을 담소하였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함안 원북에서 단성 소남으로 이거한 대소헌

‘대소헌의 나이 55세 되던 해인 신묘년(1591년) 가을에 장인인 신암新庵이 서울에서 고종考終하였다. 역변逆變 이후로 서울에 갈 뜻이 없어서 가지 않고 있다가 임진년(56세, 1592년)이 되어서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때 왜란이 발발했다. 대소헌은 소식을 듣고 즉시 서애 류성룡을 만나 영결永訣하고 영남으로 돌아오는데, 중로에서 송암 이로(1544~1598)를 만나 ‘영남에 돌아가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치자.’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함양에 도착하자 마침 그곳에 학봉 김성일이 초유사의 명을 받고 활동하고 있었던바, 대소헌은 초유사와 상의하여 송암 이로와 함께 의병을 초모招募하고 군민을 위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상필 <전게서>)

‘이때 학봉이 ‘하늘이 돕는구나.’라고 하면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대소헌은 송암 이로와 함께 통문을 내고 창의 의병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글을 통해 많은 의병이 모여들었으며, 이로 인해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강동욱 <대소헌 조종도의 성학 과정과 의리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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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찬 대소헌 신도비                                                      면우 선생이 찬한 신도비

‘영남에 돌아가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치자’

다음은 대소헌 ‘창의문’倡義文의 일부이다.
‘임금의 고통을 시급하게 여겨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은 의로운 일 중에 먼저 해야 할 일이요, 국가의 위기에 관해 도모하여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는 것은 정절貞節 중에서도 큰 것이다. …광야에 울어도 돌아갈 곳이 없고, 백일하에 고개를 들자니 낯이 없도다. 부모가 병이 들었는데도 어찌 운명에 맡겨 약을 쓰지 않으리오.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어도 혹 하늘에 힘입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죽는 것은 비록 싫지만 천지에 그물이 쳐져 있으니 도망갈 길 없고, 살기를 설사 구차하게 얻고 싶어도 개, 돼지 틈에야 차마 살 수 있겠는가. 죽는 것이 같은 바엔 차라리 의義에 죽을 것이다. 감히 살기를 바라는가. 인仁에 생명을 버려라.’ <전게서>

1597년 14만1,500명의 왜군이 다시 침략해 오니 정유재란이다. 좌군 4만5천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우군 7만5,300명은 경상도, 충청도 점령을 목표로 진격했다.
 
‘대소헌은 임진년 가을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에 제배되고 겨울에는 단성 현감에 제수되었다. 갑오년(58세, 1594년) 가을에 벼슬을 버리고 진주 소남에 있는 전장으로 돌아갔다. 그다음 해 안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으며, 병신년(60세, 1596년) 봄에 청풍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이해 가을에 함양군수에 제수되자 자주 조명朝命을 어긴 것이 미안스러워 억지로 병든 몸을 이끌고 부임하였다.
그다음 해 정유년(61세, 1597)에 병으로 체직遞職되었다. 그런데도 대소헌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처자를 거느리고 황석산성으로 들어갔다. 황석산성은 당시 체찰사體察使였던 오리 이원익(1547~1634)이 조정과 의논하여 함양·안음·거창의 백성들을 모두 들어가게 해서 결사 항전하기로 되어 있었던 산성이었다. 그래서 각 고을의 수령이 모두 산성으로 들어가게 하였고, 한편으로는 성을 수축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대소헌에게 …왜적이 이미 준동하고 있는데 신임군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나만 급히 떠날 수는 없다. …‘웃음을 머금고 칼날을 받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죽음에 초연했던 대소헌의 자세를 후인들이 이렇게 표현해낸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필, <전게서>)

7개 고을 7천명, 5일간 항전한 황석산성 전투

안음, 거창, 함양, 합천, 삼가, 초계, 산음 7개 고을의 의병, 장정, 부녀자, 노약자 도합 7천명이 정예 왜병의 우군 ‘모리 데루모도’의 7만5,300명의 정규군을 상대하여 싸운 5일간의 전투, 우군 대장 ‘모리’와 제6군 대장 ‘조소가베 모도지가’가 부상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8개월간 부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하고, 정병 4만8,300명을 궤멸시킨 7년 임란 중 가장 많은 지상군을 궤멸시킨 전투이다. 그런데도 아직 조명을 못 받고 있음이 한스럽다. 그래서 소설가 지선환은 ‘경의검 조총을 이기다.’라고 그의 소설 부제를 달았다. 이는 지리적 조건도 있지만 대소헌과 안의 현감 곽준(1551~1597), 그리고 거창 좌수이자 만석꾼 의병장 유명개劉名蓋의 지략과 백성의 신임에 있었으리라.
 
동강 김우옹(1540~1603)은 대소헌의 죽음에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어 애도했다.
영표당당우嶺表堂堂友 영남의 당당했던 벗,
심웅기역호心雄氣亦豪 마음이 웅대하고 기상도 호탕했지.
경문왕촉사驚聞王?死 왕촉이 죽었다는 소식에 놀랐으나,
긍작첩산도肯作疊山逃 어찌 사첩산처럼 산으로 도망하리.
의열부인기義烈扶人紀 의열은 인륜의 기강을 부지하였고,
영풍장본조英風壯本朝 영풍은 우리 조정에 장하도다.
평생담소처平生談笑處 평생 담소하던 곳,
강활벽천고江?碧天高 강은 넓고 푸른 하늘 높구나.
(정경주, <대소헌 조종도의 인물 형상에 대하여>)

왕촉은 제齊 나라 사람, 연나라 군대가 마을을 포위하여 회유하려 하자 자결했다. 첩산은 남송 말기의 명사다 고을 태수로 있다가 원나라 군대가 침공하여 성이 함락된 뒤 산속으로 피신하였다가, 체포 압송되어 옥중에서 단식 자결했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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