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이 같은 바엔 차라리 ‘의’에 죽을 것이다’‘소남召南은 대소헌 조종도 선생의 세장지로서 지금도 ‘조씨 고가’가 남아있다. 대소헌 선생은 1597년 황석산성에서 전사하기 이전에 함안 원북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갑오 1594)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대략 45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1530년에 하구정 조응경 공이 이곳에 먼저 터를 잡아 거주하였다는 기록도 있어 2016년 현재 대략 486년 전이 된다. 함안조씨 대소헌공파는 소남마을의 대성으로 거주하고 있다.’ (<소남마을지> 2017) 함안 원북에서 단성 소남으로 이거한 대소헌 ‘대소헌의 나이 55세 되던 해인 신묘년(1591년) 가을에 장인인 신암新庵이 서울에서 고종考終하였다. 역변逆變 이후로 서울에 갈 뜻이 없어서 가지 않고 있다가 임진년(56세, 1592년)이 되어서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때 왜란이 발발했다. 대소헌은 소식을 듣고 즉시 서애 류성룡을 만나 영결永訣하고 영남으로 돌아오는데, 중로에서 송암 이로(1544~1598)를 만나 ‘영남에 돌아가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치자.’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함양에 도착하자 마침 그곳에 학봉 김성일이 초유사의 명을 받고 활동하고 있었던바, 대소헌은 초유사와 상의하여 송암 이로와 함께 의병을 초모招募하고 군민을 위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상필 <전게서>) ‘이때 학봉이 ‘하늘이 돕는구나.’라고 하면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대소헌은 송암 이로와 함께 통문을 내고 창의 의병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글을 통해 많은 의병이 모여들었으며, 이로 인해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강동욱 <대소헌 조종도의 성학 과정과 의리 정신>)
‘영남에 돌아가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치자’ 다음은 대소헌 ‘창의문’倡義文의 일부이다. 1597년 14만1,500명의 왜군이 다시 침략해 오니 정유재란이다. 좌군 4만5천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우군 7만5,300명은 경상도, 충청도 점령을 목표로 진격했다. 7개 고을 7천명, 5일간 항전한 황석산성 전투 안음, 거창, 함양, 합천, 삼가, 초계, 산음 7개 고을의 의병, 장정, 부녀자, 노약자 도합 7천명이 정예 왜병의 우군 ‘모리 데루모도’의 7만5,300명의 정규군을 상대하여 싸운 5일간의 전투, 우군 대장 ‘모리’와 제6군 대장 ‘조소가베 모도지가’가 부상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8개월간 부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하고, 정병 4만8,300명을 궤멸시킨 7년 임란 중 가장 많은 지상군을 궤멸시킨 전투이다. 그런데도 아직 조명을 못 받고 있음이 한스럽다. 그래서 소설가 지선환은 ‘경의검 조총을 이기다.’라고 그의 소설 부제를 달았다. 이는 지리적 조건도 있지만 대소헌과 안의 현감 곽준(1551~1597), 그리고 거창 좌수이자 만석꾼 의병장 유명개劉名蓋의 지략과 백성의 신임에 있었으리라. 왕촉은 제齊 나라 사람, 연나라 군대가 마을을 포위하여 회유하려 하자 자결했다. 첩산은 남송 말기의 명사다 고을 태수로 있다가 원나라 군대가 침공하여 성이 함락된 뒤 산속으로 피신하였다가, 체포 압송되어 옥중에서 단식 자결했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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