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3) 경의검敬義劍, 조총鳥銃을 이기다

산청시대 2022-08-31 (수) 00:58 1년전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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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헌가 종택

2015년 어느 봄날, 소설가 지선환이라는 분이 찾아왔다. 그는 <군주의 배신>이라는 역사 소설을 썼던 울산 사람이다. 그 뒤로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다. 그런 뒤로 한 권의 가제본한 책을 보내왔다. <남명 조식과 황석산의 영웅들>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소설 한 권이었다. 그 부제가 ‘경의검, 조총을 이기다’였다. 지난해 <군주의 배신>에 이어서 우리 역사 바로 알리기 차원에서 집필을 시작한 <남명 조식과 황석산의 영웅들>은 남명 조식과 황석산성 전투에 대하여 쓴 것이다.
그 서문에 시인이자 비평가인 임종국(1929~1989) 선생은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 되며, 진실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소설가 지선환 <남명 조식과 황석산의 영웅들>

‘조선의 성리학자이며 가장 성공한 교육자인 남명 조식은 …경의검을… 늘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의 사후 20년 뒤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육전에서 관군이 맥없이 무너지고, 왜적은 평양과 함경도까지 거침없이 밀고 올라갔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 되었을 때, 창의 토적을 외치며 경상도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바로 의병들이다. 이때 활약한 곽재우, 김면, 정인홍, 조종도 등 총 56명의 의병장이 남명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나고 자란 고향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승리를 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 책상물림으로 글이나 읽으면서 무술에 관심이 없었던 선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의기 하나만을 믿고 손에 검을 쥔다고 해서 그것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겠으며, 활을 제대로 쏠 수 있었겠는가? 심신을 단련시키는 방법으로 평소에 꾸준히 무술을 연습하여 익힌 결과 왜의 정예병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22년 5월 어느 날, 나는 방은 조온환, 입재 권유현과 함께 대소헌 조종도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고 신도비와 종택을 둘러보았다. 이 글을 쓰면서 먼저 옛 영웅의 영전에 예를 드리는 것이 그나마 기본일 것 같아서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됨으로 미수 허목, 면우 곽종석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임진왜란 때 거병한 선비 56명은 남명 제자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1537~1597)는 본관이 함안이다.
‘고려말 금은琴隱 조열趙悅(?~1399)에 이르러서 함안에 정착했다. …금은은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켰고, 정절공貞節公 어계漁溪 조려(趙旅, 1420~1489)가 생육신生六臣으로 지절을 지킨 이래로 문성門聲이 널리 퍼졌다. 정유재란때 대소헌이 순절함에 따라 명문이 되었다. 대소헌의 학문과 충절은 금은 어계로 이어지는 가문의 전통과 남명이나 남명의 제자들로부터 받은 실천 위주의 교육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동안 9명의 문과 급제자, 13명의 충절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해 내는 등 학문과 충절로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허권수, ‘함안조씨의 함안 정착과 대소헌 가문’ <남명학 연구> 3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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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소헌 묘소                                                       대소헌 묘비


대소헌은 어계의 5대손이다. 안의 현감을 지낸 조응경趙應卿의 손자이고, 조언趙堰의 아들이다. 조언은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99~1547)의 제자로서 추천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대소헌의 어머니는 대사성을 지낸 강로姜老의 손녀이다. 부인은 오조五曹의 판서를 역임한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1524~1590)의 따님인데, 황석산성에서 대소헌을 따라 순절했다. 이준민은 남명 선생의 자형 이공량(1500~1565)의 둘째 아들이다. 승지 조원(1544~1595, 남명 문인 ‘칼자루에 써서 장원한 조원에게 준다’라는 남명 선생의 유명한 오언 절구가 있다)은 대소헌의 손아래 동서이다.
대소헌은 조선 중종 32년 함안 원북동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진주에서 보는 향해鄕解(또는 발해發解라 한다. 지방에서 시험을 보아 우수한 자를 뽑아 중앙에 보고하면 중앙에서 시험을 보아 발탁하는 제도다. 필자 주)에 선발되었다. 22세(1558년) 생원 회시 합격, 23세에 남명 문하에 입문했다.

함안서 태어난 대소헌, 23세 남명 문하 입문

‘연보에는 30세 때인 명종21년(1566년) 2월에 남명 선생을 모시고 단속사에서 구암 이정(1512~1573) 등과 의리를 강론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해 3월 남명과 옥계 노진( 1518~1578)을 모시고 갈천 임훈과 첨모당 임운 형제를 방문하여 함께 옥산동에서 노닐었다는 기록도 있다. 즉 남명과의 이러한 만남을 통하여 대소헌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본받을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남명의 장점을 최대한 수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필, <대소헌 조종도의 학문과 삶의 태도>)
 
37세에 아버지의 상이 끝나고 추천으로 안기도安奇道 찰방察訪을 8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안기도는 안동의 서쪽 5리 지점에 있으므로 퇴계의 문인인 송암 권호문(1532~1587), 학봉 김성일(1538~1593), 서애 류성룡(1542~1607), 분지 남치리(1534~1580) 등과 어울려 강마할 기회가 있었다. 이후로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48세(1585년) 때에 양지陽智 현감을 제수받았는데, 암행어사의 장계로 선정을 베푼 포상으로 표리表裏(겉옷과 속옷, 필자 주) 일습一襲을 하사받았다. 그다음 해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있다가 51세(1587년)에 금구金溝 현령에 제수되었다가 53세 기축년(1589) 겨울에 파직되었는데,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기축옥사’라고 하는 이 사건은 서인 쪽에서 무고한 동인 쪽 인물을 많이 연관시킴으로써 정치 쟁점화되어 버렸다. 남명의 문인 가운데는 조계 유종지(1546~1589), 수우당 최영경(1529~1590), 대소헌이 이 사건에 엮이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수우당은 감옥에서 자기 집 노복奴僕을 나무라듯이 옥리들을 질타하였으며, 대소헌은 평소처럼 우스갯소리를 하고 크게 웃으면서 지냈다고 한다. 이것은 옥중에서의 고사가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로써 우리는 수우당과 대소헌이 평소에 쌓았던 학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필, ‘대소헌 조종도의 학문과 삶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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