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진주 문장가 명암 정식의 ‘촉석루 중수기’ 명암 정식(鄭木+式)은 1683년(숙종 9년) 진주 옥봉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명암(明庵)이며, 자는 경보(敬甫)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대형(大亨)의 손자다. 일찍 벼슬길을 멀리하고 명산을 유람하니 무이산에 암자를 짓고 여생을 마친 조선조 마지막 선비라고 볼 수 있다. 촉석루 내에 걸려있는 중수문(重修文) 중 하나가 그의 작품인데 산문이다. 그의 산문 가운데는 ‘촉석루 중수기’(矗石樓重修記), ‘의암비기’(義巖碑記) 등 많은 작품이 지금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심금을 울린 글들이 많다. 특히,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글은 여러 종류의 유산록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산록은 산수문학의 전범典範으로서 한국 한문학사에 도입하고 새롭게 조명받아야 한다. 기문(記文)의 전체 내용은 촉석루의 웅장한 자태, 논개의 애국적 충절,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에 관한 것들과 노후화에 따른 누각(樓閣) 보수의 필요성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 글에서 기울어진 기둥과 마룻대, 색이 벗겨진 단층 등에 관한 표현이 있으며, 또한 보수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 그리고 보수가 완성되었을 때 그 아름다운 모습과 당시 진주 시민들이 환호하는 모습들을 담고 있다. 영조 원년 을사(1725년) 수양(首陽) 정식(鄭木+式) 적음
‘촉석루 중수기’(矗石樓重修記) 원문 번역 영남 땅은 산수가 아름다워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그중에서도 촉석루가 으뜸이니 우리나라 동남쪽에서 이것과 겨룰 만큼 더 좋은 곳이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돌벼랑 높이 솟아 우뚝하고 언덕에는 큰 대나무가 숲을 이루기도 하고 조릿대가 듬성듬성 수복한 데 물줄기는 둘로 갈라져서 흐른다. 기이한 바위들이 층층이 깔려있으니 이는 마치 황강(黃剛, 중국 양자강 변에 있는 유명한 곳)의 절벽에 백로의 모래섬이나 상강(湘江, 이태백이 놀던 채석강, 중국의 동정호로 흘러드는 유명한 강)의 오색찬란한 돌 빛의 아름다움과 견주어도 좋고 나쁨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다 누각에 있던 장사(壯士)들이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충성심과 바위 위에서 적장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의로운 절개는 또 악양루(岳陽樓, 동정호 북쪽에 있는 누각)와 황학루(黃鶴樓, 호북성 황학성에 있는 유명한 누각)에서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늠름하고 훌륭한 풍속은 오랜 세월동안 으뜸이로다. 날아갈 듯한 용마루와 그림이 그려진 기둥과 조각한 난간 수놓은 지게문은 갓을 쓴 선비로 하여금 다락에 올라가서 즐기면 되돌아가기를 잊게 할 뿐만 아니라 넓고 푸른 물결, 작은 배 그리고 달뜨는 섬과 안개 끼는 물기슭은 풍류를 아는 선비와 도롱이 걸친 늙은이가 빠져들게 하니 시 읊으며 놀지 않으랴. 되돌아보면 하늘이 만든 땅이 험악하기가 이와 같이 웅장하니 참으로 보배로운 산하(山河)라고 할만하다. 성터와 진지(陣地)로서는 원수(元帥)가 살만한 곳이니 이곳은 여러 막료와 술잔 들고 거문고 타며 노래하거나 혹은 무술을 강의하고 사람의 덕망을 관찰할 수도 있는 곳이다. 남으로는 물이 세차게 흐르면서 가로막아 적이 보지 못하도록 가리어 보호하여 주는 땅이니 안개와 이슬이 서린 좋은 경치나 물과 돌의 아름다움만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석하구나! 생각하면 지난 임진왜란 때도 다행히 불타지 않아 환란을 면하였건만 아를 다시 수리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은 기둥과 대들보가 기울어지고 단청이 벗겨져서 더러워진데다가 누각이 크고 아름다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옛 모양이 그대로 되어 있지 않고 여기서 손님을 맞이하고 이것을 극진히 아끼던 고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지도 이미 백여 년이 지났으며 큰 힘을 들어야 하는데 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태종 / 명암 정식 선생 무이정사 유계 사무국장 (☎010-2238-3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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