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4) 우리나라 4대 기업 창업주 정신의 모태가 된 남명

산청시대 2022-09-19 (월) 11:44 1년전 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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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 정신 뿌리관에 있는 남명 경의학 도표

‘남명 조식은 한국의 철학자로, 그 학설은 비록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우주宇宙의 기본 구성에 있어서 중국 송유宋儒에 근원하고 있으나 형이상학에서 인생철학으로 전환되는 관점, 특히 구체적인 정치 사회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으니 실천철학實踐哲學의 입장에서 행동을 지향하는 철학을 발한 것으로, 이것이 역행철학力行哲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중국 송유 철학의 최대 결점은 심성心性을 공언空言하기만 하여 ‘앉아서 말하는 것’(좌이언坐而言)은 잘하나 ‘일어나 수행하는 것’(기이행起而行)은 잘 못하는 것이다. 남명의 역행철학은 송유를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으니, 이것은 동방철학東方哲學이 실천을 중시함을 의미한다. 중국 본토 철학이 한국에 전파되어 이론적 실천에서 실천적 실천으로의 전환점에 있어서는, 남명의 공헌에 비길 자가 없다.’
오곤여?昆如 대만대 교수(뮌헨대 철학박사) (<남명 사회철학의 연구>, <남명학 연구논총> 제1집1988)

오곤여 교수의 위 논문에서 ‘이론적 실천, 실천적 실천’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말하자면 이론적 바탕은 송나라 때 물 샐 틈 없이 완성되었는데, 그 실천은 하지 않고 다시 이론을 왈가왈부하고 있으니 남명 선생은 이를 개탄하고 실천적 실천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재야 학자인 호당浩堂 김연金鍊(1929~2016, 전 덕천서원 원임)은 “아무리 큰돈을 준다고 해도 죽으라 하면 죽겠는가? 남명 선생의 교육은 기질을 변화시키는 교육이었다. 수많은 제자들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것, 스스로 자기 마음으로 일어서서 기꺼이 죽을 곳으로 가는 것은 선생 교육의 효과이다.”라고 늘 말씀했다.

그러나 남명의 교육을 늘 의병의 충혼으로만 이야기할 것인가?
선생의 ‘일어나 실천하는’ 정신, 실천하되 익숙하게 하는 ‘살활수殺活手’의 정신을 활용한 실업위민하는 마을이 있다. 유교적 전통 위에 실업을 일으켜 경세제민하는 실질을 이어온 마을. 그래서 마침내 우리나라의 기업을 일으켰다. 그 마을은 남명 사상을 높이 걸고 있다. 그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먼저 한가지 유념할 말이 있다. 영국의 평론가요 역사가인 ‘토머스 칼라일’이 “사람은 역경을 이기는 사람이 100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사람은 하나도 안 된다.”

지난 3월 29일 진주시 지수면 승산 마을에 ‘K 기업가 정신 센터’를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 진주시가 협력해서 설립했다. 진주의 기업가 정신이 남명의 실천적 실학사상에 그 연원을 찾는 것이라 한다.
한국경영학회(경영대 교수 모임)에서 ‘왜 진주에서 기업가가 많이 나오는가?’ 하는 관심을 갖게 되고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 진주시가 협력하여 ‘기업가 정신의 수도’를 선포하고, 폐교가된 지수초등학교에 LG 구자경 회장이 사비로 리모델링을 해서 2019년 7월 19일 ‘K기업가 정신센터’가 설립되었다. 건물 외관은 옛 학교 건물을 그대로 두고 내부는 현대식으로 고쳐 전시실, 강의실, 구내식당, 도서관 등으로 잘 꾸며놓았다. ‘기업가 정신 뿌리관’을 들어가니, 승산 마을 소개, 남명 선생 실학사상 내용, 이 마을 지신정 허준과 그 자녀들 소개, 삼성, 효성, 금성 창업주들의 소개와 근대 한국 산업의 태동, 발달 등을 잘 알 수 있게 게시해 놓았다.

‘남명 조식의 기업가 정신 가치체계’라는 도표에 ‘남명 조식의 경의사상과 허준 선생의 부자정신을 계승한 4대 창업주(◇GS 효주 허만정, ◇LG 연암 구인회, ◇삼성 호암 이병철, ◇효성 만우 조홍제)의 기업가 정신’이라 게시해 놓았는데, 나는 좀 더 남명학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실감있게 다음과 같이 이론화하여 ‘기업가 정신’을 도식화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첫째, 불찰절기지병不察切己之病(자기의 절실한 것을 살피지 않는 병)을 고치는 정신 : ‘오늘날의 폐단은 고원高遠한 것에 힘을 많이 쓰고 자신에게 절실한 것은 살피지 않는 데에 병통이 있다. 성현의 학문은 애초에 일상적으로 늘 행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일 혹 이것을 버리고 갑자기 성명性命의 오묘한 뜻을 엿보고자 한다면, 이것은 인사人事상에서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본성을 다하고 천리를 아는 것이 효제孝悌에 근본 하지 않겠는가, 비유하자면, 길이 두루 통하는 큰 시장에서 마음껏 노닐며 진귀한 노리개와 기이한 보배를 구경하고, 하루 종일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부질없이 그 값을 이야기해 봤자 끝내 자신의 물건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남명 선생 편년> 48 세(1548)조

둘째, 살활수법殺活手法(자유자재로 운용해 쓰는 방법을 익히는 것)에 능통할 것 : 남명 선생이 외손서인 동강 김우옹에게 편지하기를 “… 내가 그대에게 걱정스러운 것은 ‘하루 햇볕을 쬐이고 열흘을 춥게 하는 것’ <맹자> 고자告子 상편에 나오는 말로, 하루 학문에 나아가고 열흘을 그렇지 못함을 나타내는 말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근본이 확립되지 않아 행동을 절제하는 데 재능이 없으며, 학문을 강구하는 데 정밀하긴 하지만 치용致用에 졸렬하여 자유자재로 운용해 쓸 수 있는 수단이 짧으니, 이점이 가장 시급히 갖추어야 할 일입니다. 일찍이 살펴보건대, 자[척도尺度]는 집집마다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하찮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푼分·촌寸의 눈금도 매우 명백합니다. 그런데 이 자를 이용하여 구장복九章服 아홉 가지 무늬를 새긴 천자의 의복을 마름질하는 사람도 있고, 한 자 밖에 안되는 버선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예를 보면 남명 선생이 얼마나 실질을 강조했는지 알 수 있고, 알아도 능수능란하게 익혀야 실제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취지를 살려 활용했으면 좋겠다 싶다.
북동쪽으로 마을의 주산인 같은 이름의 방어산防禦山, 승어산勝禦山이 있다. 산의 바깥쪽 이름이 방어산, 산의 안쪽 이름이 승어산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도 그 승어산의 줄인 말이다. 방어산이 학의 모습으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고개를 엎드리고 기어들어 오는 형국이다. 어떤 분은 회룡고조回龍顧祖형, 어떤 분은 금게포란金鷄抱卵형이라 한다. 나지막한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 마을에 만석군이 2집, 5천석이 2집, 1천석하는 집이 14집이 났다고 하니 참으로 범상치 않다. 그리고 지금을 사는 마을 사람들도 자존심이 가슴속 가득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재산이 많아 명문가가 된 것만은 아니다. ‘조선 말기의 학자 월고 조성가(1824~1904)는 승산리 허씨 가문을 평가하여 ‘글을 심고 학문을 이루고 절행節行을 면려하여 3대로 큰선비가 온 道 안에 이름을 드날렸다. 그래서 진주에서 이름난 집안으로는 승산의 허 씨를 으뜸으로 친다’라고 하였다.’(허권수, 승산리 김해김씨 문중의 인물 1917, 남명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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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신정 허준


승산리 전거奠居 이후 문과 급제자 1명, 무과 급제자 20명, 진사 생원 합격자는 27명, 그리고 출사한 인물이 46명이다. 최고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이고, 최고 관직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다. 한 마을에서 500년 동안 이 정도의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드문 일일 것이다.

이 마을에 허씨가 처음 입향한 것은 산청의 단계에서였다 하니 더욱 관심을 끈다.
‘허옹(許邕, ?~1357)은 고려 후기의 인물로 호가 우헌迂軒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뒤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조정이 날로 어지러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단성현 단계리로 와서 은거했다. 그 자손이 단성의 법물리에 살다가 삼가현 펑구를 거쳐 조선 전기에 승산리로 와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허권수, 승산리 김해김씨 문중의 인물 1917, 남명학 연구)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1844~1932)은 만석꾼으로 그 아들 효주 허만정(1897~1592)은 진주 일신학교를 창립하였다. 허준의 재산과 정신이 모태가 되어 오늘날 LG/GS 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 주식회사’와 ‘삼성물산’ 건립의 기초가 되었다.
경화 사족이었던 능성 구씨는 구반具槃이 18세기 허륜許綸(허국주의 후손)의 사위가 되어 처가인 승산에 세거하게 되었다. 이후로 문과 1명, 생진 1명, 무과 4명을 배출했다. 사헌부 장령을 지낸 구연호具然鎬(1861~1940)가 LG 창업주 구인회의 조부이다.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은 11세에 허 씨 집으로 출가한 둘째 누이의 시가가 있는 지수보통학교를 다녔다. 함안의 효성그룹 창업자 고 조홍제 회장도 이 학교를 다녔다.
지수면을 중심으로 함안, 의령과 진주 일대에 170명이 넘는 대기업가가 났다고 하니, 솥 바위의 전설 때문일까? 승산 마을을 비롯한 기업가들의 출신 마을 풍수 때문일까? 비옥한 토지에서 수확되는 물산만 가지고 수백 년의 부를 누릴 수 있었을까? 훌륭한 전통을 세워 물질적 부를 육영 사업, 조국광복, 외적을 막는 의병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건실한 덕을 쌓은 기업 정신이 오늘의 이 마을 전통에서 나온 것이니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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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신정 허준생가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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