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5) 남명학 선양 경과(1960년대 이후)

산청시대 2022-10-04 (화) 00:34 1년전 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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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제가 효시가 된 선비문화축제


이 글은 2017년 덕천, 용암, 신산 서원 등 세 서원의 <원지>를 간행한 김경수 박사가 <덕천서원지>에 남명학의 선양 경과를 잘 정리해 쓴 글이다. 그의 양해를 얻어 싣는다.
<남명학 연구원>을 처음 설립할 때는 임의 단체로 (주)부산교통 사옥 조립식 건물 한쪽에 조규석 씨가 국장을 맡아, 조옥환 사장님의 지시를 받아 대소사를 처리했다. 사단법인으로 승격 전후에 김경수가, 그 뒤로 양기석, 조구호, 김종규가 사무국장을 맡아 살림을 꾸려왔다.
김경수가 저간의 내용을 제일 깊이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편에 조금 중복된 내용도 있으나 부분적으로 필자가 가필 보완했다. <필자 주>

1967~68년 당시 계명대학 철학과에 재직 중이던 김충렬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철학사’를 강의하던 박종홍(1903~1976) 교수가 미국으로 잠시 가게 됨에 따라 그 강의를 대신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종래에 쓰인 <한국철학사> 또는 <조선 유학사> 등에서 합당한 위상과 학문 사상을 비중 있게 다루어야 할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한 편폭과 내용이 너무 소홀하고 생략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남명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특별히 연구·보강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남명 선생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하였다.

1970년 김충렬 교수는 고려대학교로 옮기고, 문과대학생 전원이 들어야 하는 ‘한국 사상사’의 대단위 강의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남명의 학문 사상과 그의 선비정신’을 고취하여 많은 학생의 호응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김 교수는 강의내용을 논문으로 정리하여 마침내 <독서신문>에서 특별 기획한 한국 사상가 50인을 선정하여 분기마다 한 사람씩을 소개하는 난에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비슷한 시기에 남명 선생의 후손들은 오랜 침체를 벗어나 선조의 위훈지도偉勳之道를 재조명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1973년 9월에 그 첫 사업으로 계획한 남명 선생의 문집 번역과 사적 개발 사업을 위하여 뜻을 같이한 조봉조, 조원섭 등이 그 기금조성에 착수하여 진주권에 거주하는 종인 21인으로부터 협찬을 얻었는데, 특히 조옥환, 조재화, 조봉조의 천포지공天布之功이 지대하였다.

1976년에는 본 사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하여 조직을 본격화하고, 그 책임자로 조의생을 선임하여 2차 협찬을 얻어 많은 금액을 적립하였다. 또한 ‘남명 선생 탄신 추모제’를 위한 기금도 여러 종인의 협찬을 얻었다.
이러한 종인의 협찬에 의하여 저명한 번역학자를 모시고자 각 방면으로 수소문하던 중에 의외의 시점에서 학계에서 남명학을 연구·선양하고 있던 김충렬 교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김 교수는 대중지라고 할 수 있는 월간 <세대>世代의 요청으로 남명 선생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내용의 글을 게재하였고, 또 1976년 6월에는 월간지 <문학사상>에 ‘지식인의 수난사’란 제목의 글에서 남명 선생의 행적을 기고하였다.

이 시기에 김 교수의 강의를 들었던 남명 선생의 후손 조을환이 고향 덕산에 남명 선생의 후손이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김 교수에게 알렸고, 김 교수의 글을 읽은 조원섭의 딸 명숙(당시 숙명여대 재학)이 이러한 사실을 문중에 알려주어 그 책을 구하여 탐독하고서, 이는 곧 성대곡成代谷 선생이 말한 “하필 지금의 사람들에게서만 알아주기를 구하리요, 곧바로 백 세를 기다려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라”고 한 ‘아는 사람’이 바로 김 교수라고 하면서 크게 반가워하였다.
이에 종인 두 사람이 1977년 3월 초에 상경하여 김 교수를 예방하고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문중을 대표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 당시 진행 중인 사업 현황을 수의한 결과 문집 번역자로는 한학자 조규철(1906~1982)씨를 추천해 주었으며(조규철은 감수, 이익성이 번역하여 8월 10일에 출간되었다), 8월로 예정된 ‘제1회 남명제’와 ‘학술강연회’에 참석할 것을 쾌히 승낙하였다.

8월 9일, 당시 새마을 연수원 부원장으로 있던 조영기 씨의 안내로 김 교수는 진주에 오게 되었고, 진주 학생체육관에서 2천명 이상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김충렬 교수, 정중환(1914~2001) 교수, 박종한(1925~2012) 진주 대아고 교장의 학술강연회가 성황리에 이루어져 진주 문화권에 폭넓은 호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다음날인 10일에는 당시 ‘경남 사립중고등학교 교장회’ 회장이던 박종한 선생이 마련한 ‘제1회 남명제’가 덕천서원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어 남명 선생 현양 사업의 모태가 되었다(지금도 경남 사립중고등학교 교장회가 해마다 남명제를 지원하고 있다).

당일 김 교수는 ‘알남명선생사우’謁南冥先生祠宇(남명 선생 사당을 배알하며)라는 시를 지어 감회를 표했다.

천리진주반일정(千里晉州半日程) 천 리 진주가 한나절 길이니,
조사한북모산청(朝辭漢北暮山淸) 아침에 서울을 떠나 저물녘 산청에 왔네.
운장지리진면목(雲藏智異眞面目) 구름 덮인 지리산은 진면목을 숨기었고,
수격양당세속정(水激兩塘世俗情) 물은 양당에서 만나 세속으로 흐르네.
처사촌심행원수(處士村深杏院邃) 처사가 살던 마을 서원은 그윽한데,
철인비고석화청(哲人碑古石花靑) 철인의 빗돌 예스러워 석화가 푸르르다.
이금영기무귀속(而今靈氣無歸屬) 이제껏 영령 돌아갈 곳 없어서,
적막선생대후생(寂寞先生待後生) 적막한 선생은 후생을 기다렸네.
 
그 이후 학계의 배종호 교수는 ‘수년 전(1978년)에 발간한 <한국철학 연구>(동명사)의 중권에 김충렬 교수의 논문 ‘조식의 학문과 사상’이 실리게 되는데, 그 논문에 대한 논평도 실을 예정이라면서 필자에게 그것을 의뢰한 일이 있었다. 나는 불미하게도 그때까지는 <남명집>을 읽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논평을 사양하였다. … 여하튼 김충렬 교수의 남명 사상이 한국 철학계에 소개된 것은 사학斯學 연구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남명학연구론총> 제1집 28쪽)이라고 하는 바와 같이, 그때까지도 남명 선생에 관한 학계의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로부터 학계 연구도 조금씩 많아지고 ‘남명제’가 계속 이어져 세인의 관심이 점차 높아지자 남명 선생의 후손들과 산해연원가山海淵源家의 후예들 그리고 진주지방의 명사들이 남명학 연구원을 설립할 것을 발기하였다.
진주 삼현여고 교장이었던 아천 최재호 선생이 발기인대회를 주관하고 이사진과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1986년 8월 24일 ‘남명학 연구원’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초대 운영위원장에 조옥환, 이사장에 하동근, 원장에 김충렬 교수가 선임되었다. 그리고 경상대학교 오이환 교수에 의해 방대한 분량의 남명학 관련 고문헌을 수집 복사하여 비치함으로써 연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 이사장은 권순찬 전 연암공대 학장, 권정호 전 진주교대 총장, 최문석 진주 삼현학원 이사장을 거쳐 현재 김선유 전 진주 교육대학 총장으로 이어져 왔고, 2대 원장은 한국학 중앙연구원 부원장을 지낸 박병련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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