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석 사랑채] 정호승의 ‘그리운 부석사’

산청시대 2022-11-18 (금) 00:07 1년전 767  

f4be7c43e1b5b16cb06633eaf2bb6f08_1668697
부석사 일주문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 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겼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 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시인은 2010년 11월에 열 번째 시집, <밥값>을 창비에서 출판하였다. 그만큼 많은 시를 쓴 시인이다. 그는 생존해있는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슬픔과 사랑을 승화시키고 삶과 인생에 대한 통찰로 깊이와 품위를 잃지 않는다. 짧고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는 시, 정호승 시인의 멋이다.

 

f4be7c43e1b5b16cb06633eaf2bb6f08_1668697

‘그리운 부석사’
이 시도 시인의 정서가 잘 녹아 있는 후기 대표작이다. 시인은 사십이 넘어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맨몸이 된 어느 나른한 봄날, 홀로 길을 나서 영주의 부석사를 찾았다.
부석사 매표소를 지나 1km 남짓한 오솔길을 오르며 주변의 사과나무와 은행나무들과 대화를 한다. 앙상한 사과나무 가지에 이제 막 머금은 눈망울을 보면서 우주의 강한 생명을 본다. 생명, 그것은 곧 행동이겠다.
일주문을 지나 비탈길을 조금 오르니 당간의 버팀돌 한 쌍이 세파에, 다를 대로 달아 가슴에 품고 싶도록 애절한 모습으로 높이 서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을 빚은 솜씨와 다르지 않다.

f4be7c43e1b5b16cb06633eaf2bb6f08_1668697
​당간지주                                                                         국보 제17호 석등

시인이 놀란 것은 애절한 당간지주 앞에 당간지주만큼이나 애절해 보이는 한 여자가 서 있음이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무심히 서 있는 여자, 가까이서 보니 선녀가 따로 없다. 누구를 기다릴까. 오래된 애인일까? 아니면 처음 만나기로 한 연인일까? 어쩌면 나일까!
그렇다고 안면 없는 여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시인은 여인을 가슴에 묻은 채 곧바로 천왕문을 지나 범종루와 안양루를 넘어 국보 제17호 석등 앞에 섰다. 달아서 보들보들한 석등을 어루만지며 언제 보아도 천하절색인 무량수전을 우러러본다.

이어서 시인은 애인 같은 배흘림기둥을 쓰다듬으며 법당 안으로 들어가 아미타불 앞에 엎드려서 운다. 시인은 불상을 보면 잘 운다고 한다. 한참 만에 법당을 나온 시인은 안양루에 오른다.
저 멀리 동남쪽으로 태백산 영봉들이 지는 해의 붉은 빛을 받아 반짝반짝 밀려온다. 천하절경이다. 이 절경을 두고, 늙어 가는 것을 서러워한 김삿갓의 시 한 수가 현판에 걸려있다. 글씨도 명필이다. 시인은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뒤로하고 몸을 돌리니 ‘선묘각’과 ‘조사당’의 초라한 모습이 쓸쓸하다.
선묘를 생각하니 의상의 마음이 아프다.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생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속 눈물을 흘리면서 이 절 하나 지어 화엄을 깨우친다 한들 그게 뭐가 대수인가. 비로자나불도 아미타불도 손가락 하나나 모가지 하나에 매달려 있거늘 하물며 인간이야 그렇게 고고할 게 뭐 있었는가.

비록 지옥에 갈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여라. 그 밤을 넘어 새벽을 지나건만 시인은 ‘쇠 종’ 소리가 울리지 않음으로 하룻밤 누운 방바닥을 지고 의상의 독백을 듣는다. 귀는 독백을 듣고 마음은 문득 어제 당간지주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만나고 있다.
아, 여인이여,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사랑하려거든 선묘 여인처럼 하여라. 기다리다가 죽지 말고 차라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생토록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는 그런 의상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지 말고 어서 나에게로 오라.

정호승 시인은 사랑 시를 많이 쓴 시인이다. 그의 연시는 대개 감미로운 향기를 뿌린다. 하지만 이 ‘그리운 부석사’는 향기가 아니라 독기를 풍긴다. 죽으라고 윽박지른다. 여기서 그리운 부석사는 바로 의상의 선묘인 것이다.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는 시인의 요구는 너무 강렬하여 거부감까지 든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을 뛰게 한다. 의상을 위하여 청춘을 바쳤고, 끝내는 바닷물에 몸을 던져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도우려는 선묘의 숭고한 사랑을 시인도 해보고 싶었으리라.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는 바로 시인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닐까. 아니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한 말일 게다.
시인 때문에 나도 부석사가 그리워진다. 당간지주 앞에 아직도 그 여인이 서 있다면 누군들 기꺼이 업고 내려오지 않겠는가.

f4be7c43e1b5b16cb06633eaf2bb6f08_1668697

신상조 편집위원 / 전 농협중앙회 감사실장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정치
자치행정
선비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