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지역은 남명선생의 흔적이 많은 고장

산청시대 2023-03-16 (목) 10:44 1년전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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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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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절각

어계의 5세손이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1537~1597)로 남명선생의 문인이다. 대소헌의 장인인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은 5조의 판서를 지낸 분인데 남명선생의 자형인 이공량李公亮의 아들이다. 서산서원은 생육신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서원 앞의 산이 백이산伯夷山과 숙제봉叔弟峰이고 서원 바로 옆에 채미정採薇亭과 쌍절각雙節閣이 있다. 쌍절각은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대소헌과 그 부인 전의이씨를 기리는 정려이다.

 

모은 이오李午는 재령이씨로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삼는다. 몇 대를 지나서 문하시중 이우칭李禹?이 재령군에 봉해짐으로 관향을 재령으로 했다. 공민왕의 부마 상장군 이소봉李小鳳을 1세로 하여 모은공은 그 손자이다. 모은공의 아들 이개지李介智(1415~1547)가 진주하씨 성주 목사 하경복河敬復의 외동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형 근재覲齋 이맹현李孟賢(1416~1487)은 서울로 이거하여 성종조에 직제학 이조참판 나주 목사를 지냈고, 동생 율간栗澗 이중현(李仲賢, 1449~1508)은 함안에 세거했다. 영해부사에 조카(이맹현의 아들) 이애李?(1480~1561)를 거부인 진성백씨 백원정白元貞의 사위가 되게하여, 재령이씨 영해파의 입향조가 된다. 그의 손자 운악雲嶽 이함李涵(1554~1632)이 대과에 급제하여 의령현감을 지냈고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다. 운악의 삼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이 안동장씨와 혼인하여 아들 칠형제를 낳앗다. 그 둘째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다.

 

율간의 손자가 이경성李景成인데 남명선생이 김해를 오갈 때 이 집에 들러 쉬거나 유숙했다고 한다. 그 아들이 모촌 이정이다. 1555년(모촌 15세) 남명선생이 부친 참판공을 만나러 왔다가 4형제가 의좋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했다 한다. 모촌은 1559년 19세 되던 해 봄에, 남명선생으로부터 <중용>, <대학>, <심경> 등을 배웠다. 1592년 5월에 유숭인(柳崇仁, ?~1592) 함안 군수 휘하에서 소모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진해 창원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김면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칭, 박제인 등과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36세 봄에 최영경 하항 등과 함께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협력하였다. 54세(1594)에 사헌부 집의執義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자, 이어 단성 현감에 제수되었고, 57세(1597)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령 현감으로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1564~1624)와 함께 의령에 침입한 나베시마(과도직무鍋島直茂) 휘하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60세(1600)에 벼슬을 버리고 진주 원당元堂으로 거처를 옮겼다. 62세(1602)에는 성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63세 5월에 선산 부사, 7월에는 창원 부사에 제수되었다. 박한주의 사우를 건립하였으며, 박제인 이칭과 더불어 <함주지>를 편수하였다. 진극경, 하징, 성여신 등과 더불어 임란 후 덕천서원을 복구하였으며, 여러 동지들과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렸다.

1613년(광해5년) 73세를 일기로 원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강 정구(鄭逑, 1543~1620)는 함안 출신은 아니지만 1586년 함안 군수로 부임하여 함안의 여러 선비와 최초의 읍지인 함주지를 편찬하였다. 남명선생 제문을 세 차례나 지었고, 대곡이 지은 묘갈명을 많은 사람이 탁본을 떠 가 비석이 닳을 것을 염려하여 안동 부사 재임 시에 목판을 만들어 덕산으로 보내기도 했다.

 

모암茅庵 박희삼朴希參(1486~1570)은 남명선생의 종유從遊이고, 그의 두 아들 송암 박제현(朴齊賢, 1521~1575)과 황암 박제인(朴齊仁, 1536~1618)은 1545년 남명선생을 찾아뵙고 제자가 되었다. 부친 모암은 유일로 천거되어 덕릉과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경주 박씨이다. 제현은 유일로 누차 천거되어 부친의 명으로 선공가감繕工假監을 몇 달간 머무르다 사직하고 돌아왔다. 제인은 태릉 참봉, 왕자사부에 제수되었으나 불취. 70세에 형조정랑에 제수되고 군위軍威 현감의 외직을 맡아 3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3부자 모두가 평천서원에 제향되었다. 20년쯤 전에 황암재를 낙성할 때 초청된 적이 있어서 찾았는데 후손 박기학씨가 맞이해 주었다. 서원의 옛터에는 평천서원유허비平川書院遺墟碑 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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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이씨 종택

 

성산이씨 이사李士의 아들 황곡篁谷 이칭(李? 1535~1600), 검계儉溪 이길(李佶 1538~?) 두 분도 남명선생의 문인이다. 1566년 남명선생이 안음 옥산동과 갈천 임훈을 찾아갈 때 이길이 배행했다고 하니 그 몇 년 전에 입문했으리라. <용화산동유록>龍華山同遊錄에 이길은 정구 곽재우등 수십명과 동유했다. 이들은 노파蘆坡 이흘(李屹 1557~1627)의 외종숙이다. 황곡은 석성 현감, 지평을 역임했다.

 

죽유竹? 오운(吳澐, 1540~1617)은 고창오씨高敞氏이다. 모곡리에서 아버지 수정守貞과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산해정으로 남명선생에게 집지하여 제자가 되었다. 27세(1566)에 별시 문과에 유성룡 김우굉 등과 함께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60세(1599)에는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예원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62세에는 대구부사로 제수되었다. 1592년에는 곽재우 휘하의 수병장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합천 부근의 왜적을 무찔렀다. 권율(1537~1599)의 추천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隣의 접반사로 활약하였다. 동사찬요東史簒要, 용사난이록龍蛇亂離錄을 지었다. 한천사寒天祠에 배향되었다.

 

운창雲? 이시분(李時? 1588~1663)은 장수이씨로 단성 어은동에서 출생했다. 용인 필동에서 증조부 때에 이주했다. 어려서부터 중부仲父인 고산孤山 이삼로(李三老, 1560~1645)에게 공부했다.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53세에 단구지丹丘誌(혹은 운창지)를 완성했다. <덕천서원 사우록>과 <학기류편> 편찬에 관여했다. 무민당無悶堂 박인朴絪(1583~1640),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953~1666), 태계台溪 하진河?(1597~1658), 학포學圃 정훤(鄭暄, 1588~1647), 등과 친교했다. 후손들이 칠원에 옮겨 삶으로 칠서면 청계리에 청계서원淸溪書院을 건립하고 마을 입구에 운창의 행적비를 세웠다.

 

광서匡西 박진영(朴震英, 1569~1641)도 남명학파다. 아버지 박오朴旿는 호가 동천桐川이다. 임란 때 백의로 창의, 아들 박진영에게 의병 100명을 주어 김해성을 탈환하고 동천은 진중에서 별세하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박진영은 외적이 많았던 시대를 살면서 나라를 위해 창의한 함안의 선비다. 8세에 모촌 이정을 뵈었고, 11살에 황곡 이칭에게, 16세에 수우당 최영경에게, 한강 정구가 군수로 오고 나서 한강 문하에서 수업했다. 24세에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자감 참봉에 임명되고 선무 원종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56세 ‘이괄의 난’ 때 진무 일등공신에 녹훈되어 황해도 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62세에 광려산匡廬山 아래에 물러나 있었으므로 광서라 자호했다. 병자호란에도 7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인조 27년(1649) 숭정대부판돈녕부사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증직되고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워 향사했다. 시호는 무숙공武肅公이다. 후손 박정규朴貞奎, 박권곤朴權坤 등이 추숭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다.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1585~1664)를 이야기 않을 수가 없다. 사도시司?寺 첨정僉正 조식趙埴의 아들이요, 그의 5대조가 어계 조려이고 대소헌 조종도가 삼종형이다. 17세에 인동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스승 삼았다. 23세에 노파蘆坡 이흘(李屹, 1557~1627)의 따님과 혼인했다. 50세에 신산서원 원장을 지냈다. 75세에 공조좌랑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황암 박제인, 망우당 곽재우, 모계茅溪 문위(文緯, 1555~1632), 능허凌虛 박민(朴敏, 1566~1630),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 등 강우의 대표적 학자들을 선배로 따랐다.

이처럼 함안 지역은 남명학파의 고장이요, 남명선생의 흔적이 많은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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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천서원유허비

 

※참고한 자료.

<남명선생 문인 자료집>. 김경수·사재명, 남명학연구원, 2001.

<모은선생실기>. 이기빈 편.

<서산서원 삼백년사>. 사) 서산서원

<무숙공 박진영 그 애국의 삶을 조명하다> 문창문화연구원 엮음, 무숙공 박진영 장군 기념사업회.

<남명의 연원을 찾아, 황암 박제인> 남명원보, 제26호, 2002년.

<황암 박제인의 선비정신> 한상규, 남명학연구 제3집, 1993년.

<함안 인물지> 허권수, 도서출판 술이, 2019.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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