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 문화유적 답사 (1) 대가야 멸망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진 생초 가야

산청시대 2024-03-29 (금) 01:19 1개월전 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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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들이 올해 들어 전문 역량 강화를 위해 산청군내 문화유적을 순화 답사하고 있다.

문화관광해설사 11명은 지난 1월 29일 생초면 어서리 산93-15번지 일대 생초 고분군을 답사했다.

 

◇산청의 가야 시대는

산청군은 원삼국시대 또는 삼한시대에는 변한 12국 중 고순시국이, 가야 시대에는 걸손국이 있었던 지역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그런데 과거 역사를 기록한 어떤 문헌에도 자세한 기록이 없어 그 실체를 확실히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다만 경호강을 비롯하여 덕천강과 양천강, 단계천의 주변에 형성된 비옥한 평야와 이와 가까운 야산의 정상부와 구릉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 산청지역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와 가야 시대의 유적은 대략 120개소가 알려져 있다. 이 중 가야 유적은 매장유적 44개소. 주거유적 3개소 유물산포지 11개소 등 모두 69개소나 발견되어 번성했던 산청지역 가야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생초지역 가야, 형성과 발전

생초지역 가야란 오늘날 산청군 북부지역에 위치한 생초면 일원에 세력을 형성하여 성장, 발전했던 가야 소국 혹은 가야 정치 체제를 말한다. 가야 시대에 걸손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최근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생초지역 일원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가야 소국이 4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 후반대까지 번성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우선 생초면 월곡리 관지고분군 등에서 발견된 고배(高杯: 높은 굽이 달린 고대 식기)와 노형기대로 구성된 고식도질토기를 통해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한을 모태로 한 가야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것이 목관묘를 축조하고 고식도질토기를 제작, 사용하는 4세기부터라는 사실이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초지역 최대 고분군인 생초 고분군을 비롯하여 경호강 넘어 상촌리와 평촌리, 갈전리 일원의 충적지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주거유적과 농경 유적. 매장유적 그리고 생산유적 등도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즉 생초면으로 뻗어 내린 태봉산 자락의 정상부와 그 사면에는 생초지역 가야 수장들과 지배층이, 그 아래 사면과 경호강 건너 평촌리 일원에서는 대가야 토기를 비롯하여 소가야 토기, 백제계 토기 신라계 토기, 왜계의 토기와 청동거울 등이 발견되어 주목되는데 이는 생초지역 가야 세력이 경호강과 남강, 남해안으로 이어진 관계망을 교통로로 하여 주변의 여러 세력과 직접 혹은 간접으로 교류, 교섭한 사실을 전해지고 있다.

 

◇생초지역 가야 지배자는

생초 고분군은 일찍부터 남부지역의 중촌리 고분군과 대비되는 산청 북부지역의 중심 고분군으로 주목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그 내용과 성격을 알 수 없는데 2002년과 2004년 경상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고분군의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생초 고분군은 해발 366.9m의 태봉산에서 남쪽의 경호강 쪽으로 뻗어 내린 야산 정상부와 사면에 크고 작은 봉토를 가진 30기의 봉토분과 수백 여기의 석곽묘가 밀집, 분포하고 있는 가야의 대 고분군으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또한 매장 시설은 봉토의 유무와 상관없이 천석(泉石: 돌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의 경치) 또는 할석(割石:깬돌)으로 쌓아 올린 후 그 위에 개석(蓋石: 돌방 위에 덮는 돌)을 덮은 제장형 석곽으로 내부에는 고배. 개배. 단경호. 발형 기대 등으로 구성된 토기류를 중심으로 대도와 철모 철촉 제갈 등과 같은 철제물 기류와 마구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부장품을 대량으로 부장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생초 고분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고분의 구조와 부장품 대부분이 대가야계 또는 대가야양식에 속한다. 

즉 대형 봉토분인 M13호 분의 내부에 만들어진 주곽과 부곽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이라든지 대량으로 부장된 여러 종류의 토기들의 특징이 대가야의 중심 고분군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견되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처럼 고분의 구조와 부장품이 대가야 것과 연결된다는 것은 결국 생초 고분군이 후기 가야의 중심국이었던 고령 대가야와 깊은 관계 속에서 조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생초 고분군은 남쪽의 중촌리 고분군과 달리 대가야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고분군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고분에 묻힌 주인공들 역시 대가야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러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5세기 후반대 대가야의 동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초 고분군에 조성된 대규모의 봉토분이 그러한 증거로, 그중에서도 지름 20m가 넘는 대형 봉토를 축조하고 그 내부에 석곽에 단봉문환두대도와 은장철모와 금동장 f자형 판비와 검릉형행엽, 마령 등으로 구성된 대가야 최고의 위세품을 부장한 M13호 분에 묻힌 주인공은 생초지역 가야 전성기의 최고 지배자였다. 

이후 생초지역 최고 지배자들은 서쪽으로 그 묘역을 옮겨가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대형 봉토를 축조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하다가 6세기 후반 대가야의 멸망과 함께 역사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글, 사진 / 민향식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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