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답사(2) 승천하는 황제가 던져준 활을 안고 운 읍궁대

산청시대 2024-04-11 (목) 13:54 1개월전 245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들이 올해 들어 전문 역량 강화를 위해 산청군내 문화유적을 순화 답사하고 있다.
문화관광해설사 11명은 지난 2월 26일 삼장면 대하마을에 있는 경우당과 읍궁대를 답사했다.

경우당과 읍궁대
시천면 원리 삼거리에서 친환경로를 따라 산청 방향으로 가다가 삼장천을 건너기 전 왼편에 대밭이 병풍처럼 둘려 있는 동산이 있고 그 가운데 전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그곳이 읍궁대이다.
읍궁대를 중심으로 삼장면 대하, 다간(대간), 신촌, 시천면 경계에 이르기까지 넓은 들이 펼쳐지고 삼장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읍궁대 아래에는 대하(대래)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을 대하, 또는 대래라고 한 것은 읍궁대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덕산에 자리 잡기 전에는 밀양손씨들이 대하마을에 먼저 들어와 살았는데, 임진왜란 전, 후에 덕교마을로 이주하였다 한다.
그 후 남명 선생의 후손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창녕 조씨 집성촌이 되었고, 한때는 100여 호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진양지>에는 읍궁대를 중심으로 언덕 뒤편 지금의 대포리를 대중동, 그 위쪽 덕교리 들판을 상중동으로 기록하였다.
대하마을의 남쪽 뒤에는 대포리 황점마을로 통하는 좁은 길이 있는데, 이 골짜기에 경우당이 있고 그 뒤 언덕에 읍궁대가 있다. 
읍궁대에 서면 북쪽으로 삼장면 석남리, 평촌리, 밤머리재까지 한눈에 바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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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당
경우당景愚當
1918년에 동몽교관 노우老愚 조명훈曺命勳(1739~1818)을 위해 건립되었다. 남명 조식의 6세손인 노우공은 지평持平 천필天弼의 아들이며 현감 조용완의 아버지다. 경우당 기문은 중재 김황이 썼다.

읍궁대泣弓臺
경우당 뒤 언덕에 있다. 노우공 조명훈이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3년 동안 매달 초하루 보름마다 집 뒤 언덕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곡을 하였다.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이 조처사曺處士 망곡대望哭臺라 불렀다. 이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순조 임금이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을 증직하였다.
읍궁대 이름은 그의 후손 복암 조원순이 지었다. 
‘옛날 중국 황제가 치우의 난을 평정하고 하늘로 승천하면서 작별을 슬퍼하는 백성들에게 애용하던 활을 던져주자 사람들이 그 활을 끌어안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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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궁대

조명훈曺命勳(1739~1818)
자는 성보聖甫 호는 노우老愚로 남명 조식 선생의 6세손이다. 그의 부친 천필은 시천면 사리에 살았는데 노우공이 대하로 옮겨와 살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위독할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드리워 살아나게 하였고, 임금이 승하하자 3년을 방곡하였다. 증직으로 조봉대부 동몽교관을 받았다. 
어지러운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처럼 살고자 했던 노우공은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판 이건창(1852~1898)이 묘갈명을 썼다.

조용완曺龍玩(1736~1832)
자는 백옥伯玉 호는 덕암德巖으로 노우 조명훈의 아들이다. 정조가 고가古家의 후예를 찾아보라 명하자, 경상감사 이의강(1742~1799)이 9명을 천거하였다. 이때 남명 선생의 7세손 덕암이 1778년에 정릉 참봉에 제수받고 차츰 계제가 올라 1804년에 용궁 현감을 역임하였다.
1796년 덕천서원 경의재 중수를 주도하였고, 취성정을 세심정 북쪽에 중건하였다. 산천재 중수와 <남명집> 인출 등 남명의 선양사업에 힘썼다. 
덕산 입구 입덕문 근처 바위에 덕암德巖이라 새겨진 글씨가 남아 있다.

글, 사진 / 안승필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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